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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 2: 근현대편 (한국역사연구회) - 돌베개

야곰야곰+책벌레 2022. 9. 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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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한국사 2권은 개항기부터 현대까지 서술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한류를 이끌고 있는 블랙핑크나 오징어 게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발행 직전까지 집필 교열 작업이 이뤄줬음을 알 수 있었다. 개항기부터 식민지 시대까지는 핍박의 시대였고 근현대 사회는 친일파와 쿠데타의 얼룩진 역사 속에 민주항쟁이라는 빛을 본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어 오르는 감정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암울했던 근현대 편은 그런 면에서 읽기가 힘들었다.

  찬란하고 통쾌한 역사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만주 벌판을 내달리던 광개토대왕이나 일본 수백 척의 배를 수몰시킨 이순신의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가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아프거나 골치 아픈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 속 우민화 정책은 그런 면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노림수이기도 하다. 짜증 나고 힘든 역사에 대하나 외면은 철저하게 파헤쳐서 제대로 알려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있기도 하다.

  대한이라는 호칭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마한, 진한, 변한 의 삼한의 통일을 의미한다. 삼한을 통일해서 제국을 형성했다는 뜻에서 대한제국이 되었고 역사를 잇는 대신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을 담아 대한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늦은 개항과 개혁으로 개혁과 왕권 확립이라는 두 세력이 대립되었고 그러는 사이 중국과 일본은 서양 제국들에게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알리기에 여념 없었다. 조선은 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미국, 영국 등등의 제국들 사이에 끼여 있었고 그들의 판단에 따라 재단되었다. 내부적으로 독립을 노력하였으나 열강들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포츠머스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보호, 지도 및 감독의 권리를 받았다. 고종은 대한제국이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서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지만 일본은 이것의 책임을 고종에 물어 퇴위시켰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이완용, 박제순 등 '을사 5적'의 주살의 상소로 이어졌고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은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의병 운동에는 해산된 군인들이 참여함으로써 전술과 무기가 보충되기도 했다. 

  친일, 친러, 친미, 친중 등의 세력들은 이념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익과 특권에 의해 결정되었다. 초기 친러 세력이었던 이완용이 어느 순간 친일 세력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들의 주된 논리는 그 당시 유행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대표적인 친일파 윤치오는 '물지 못하면, 짖지도 말아야'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친일 세력이 다양한 논리로 정당화하더라도, 결국 제국주의 지배체제의 또 다른 지배층이 되고 싶은 욕망의 실현이었을 뿐이다.

  이승만은 1919년 3월 미국에 한국을 통치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임시정부 비판 세력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승만의 외교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비판이 일게 된다. 1920년 말 이승만은 반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추후 남한에 들어선 미군정은 반공적이고 친미적인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미군정의 목표는 반공, 반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에 관심이 없었고 이미 잘 교육된 사람들을 이용하여 빠르게 안정화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승만도 친일파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초대 국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을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과 친일파는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를 노골적으로 방해했고, 반민 특위는 682건의 친일 행위를 조사하는 데 그쳤고,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12명에 불과했다. 실제로 집행된 사형은 한 건도 없었고 대부분 감형이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국회의 지지를 잃은 이승만은 직선제로 바꾸기 위해서 무력을 동원했다. 이승만에게 비판적이었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이라는 혐의로 체포하기 시작했다(부산 정치파동). 3대 대통령을 위해서 또다시 개헌을 시도한다. 금품 살포와 부정선거로 자유당의 의석을 확보한 뒤 개헌 투표를 했으나 135표로 1표가 부족했지만 반올림해야 한다는 궤변을 부리며 단독으로 가결해 버린다(사사오입 개헌). 1956년 선거에서는 민주장의 신익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이승만은 조봉암을 이기고 다시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고 사형을 시킨다. 대통령이 죽을 경우 부통령이 승계하는 점을 걱정한 자유당은 부통령 당선을 위해 부정 선거를 자행한다(3.15 부정선거). 부정선거에 분노한 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마산항쟁 때 실종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어 항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서울의 대학생들에게 전달된다. 4.18일 고려대 학생 3,000명의 집회를 이승만 정부와 결탁한 100여 명의 깡패들이 습격한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은 4월 19일 대규모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제주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제주도 좌익 세력이 도내 경찰과 우익 청년단을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3.1절 기념 시위 이후 제주도민이 당한 수탈과 폭력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을 실사하였고 다수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체 희생자의 80%가 정부 측에 의해 학살돼었으며, 희생자의 3 분의 1이 열 살도 안 된 어린이와 노인과 부녀자였다. 여순 사건 또한 제주 4.3과 직접적 연관 속에서 발생했고 대략 2,000 ~ 3,0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국군 병력의 5%에 이르는 4,700여 명이 숙청되었다. 한국은 반공 국가로 변해갈 제도적 기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시대 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미국의 침묵은 철저히 미국의 자국우선주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미국에 약속했는데, 이를 위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더 이상 국민이 뽑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도록 했다. 하지만 이들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다. 이는 '체육관 선거'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는 99.9%로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부마항쟁 직후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의 12.12 쿠데타로 인해 다시 군부 정권이 들어섰다. 

  6월 항쟁부터는 여러 책으로부터 많은 것을 읽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은 꾸준히 북한과 남한의 관계 변화에 대해서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인 정세 속의 한국의 변화도 함께 설명했다.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붕괴로 다시 화해무드가 조성되기도 했으나 다시금 신냉정시대로 도래되기도 했다.

  정리하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았지만 일일이 적기에는 너무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근대 우리 역사는 너무 많이 숨겨져 있기도 했고 기득권의 방해로 왜곡되기도 했다. 비난 일색일 수도 있는 부분에서도 이 책은 덤덤하게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자국민을 집단 학살했다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끔찍했다.

  시민의 한국사 2권은 정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친일파를 보수라고 정의해준 미군정이 야속하기만 하다. 우리나라 보수집단이 수구화 된 것에 이런 역사가 있다는 이해도 할 수 있었다. 근대의 역사는 아직 살아있는 기득권과 권력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게 대립되는 것 같다. 우리가 외면할수록 간절한 사람들의 마음대로 역사는 해석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수많은 왕들의 기록 또한 여러 사료를 대조해보는 것과 같다. 역사의 해석을 후대에게 남겨두더라도 우리는 더욱 제대로 된 사료를 남길 의무는 있을 것이고 이 책은 그런 의미에 중요한 자료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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