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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 창비

야곰야곰+책벌레 2022. 7. 3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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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은 어느 세대에서나 화두였지만 최근처럼 '공정'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키워드가 '공정'에 맞춰져 있다고 하며 여기저기에서 공정을 언급하며 시대의 지도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공정이라는 것에 대한 많은 토론과 책들도 나오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 무엇인지 여전히 확실히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게 보이는 공정은 나의 문제에서만 공정인 듯했다. 선택적 분노였던 것 같았다.

  시대가 외치는 공정. 그 공정의 프레임 속에서 주도하려고 하는 많은 생각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공정'이라는 키워드일까? 굉장히 넓은 의미를 가지는 공정을 굉장히 좁은 의미로 공정으로 사용하는 지금의 시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하는 이 책은 창비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공정이라는 거대 담론은 시대의 어쩔 수 없음을 이유로 아주 편협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능력주의와 결합되어 능력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공정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불안정성이 높아진 사회에서 경쟁은 더욱더 심해지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는 분노하게 되었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프레임을 만들고 분노를 조장하고 있다. 

  갑자기 급부상한 '공정'이라는 화두는 그동안 사회 안전망에 투자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었다. 원래 누려왔던 권리를 박탈당하는 피해 입은 특권들의 분노도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너의 상황은 너의 책임이지', '나도 노력했어. 너도 노력하면 가능해', '나는 죽도록 고생했는데, 너도 고생해야지'와 같은 공정 경쟁, 각자도생, 능력주의로 이어졌다. 이런 논리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 안전망의 필요성을 부단히 부인하고 있다. 

  그 많은 공정에 대한 언급이 있음에도 우리나라에서 공정은 늘 제자리를 머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 담론이 확대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자신들과 동일한 선 상에 놓여 있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격 박탈이다. 특별한 위치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입사시키는 것은 모두가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공정'이며 공정은 그네들만 외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두 번째는 자연화된 인식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평가다. 지난 팬데믹 상황에서 공공의료 확대를 얘기할 때 대한의사협회의 카드 뉴스는 이를 잘 보여 준다.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전교 1등 의사와 의사가 하고 싶은 성적이 낮은 의사 누구에게 진료를 받고 싶습니까?'라는 식의 발표는 그들의 사상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이해관계의 문제를 공정의 문제로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공정과 불공정의 표현이 등장하면 실질적인 논의가 외면당해 버린다. 그리고 개별 사안들을 추상적이거나 거대한 담론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정당화해버리기도 한다. 기득권들은 이미 가진 권력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여론을 조작한다. 언제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정당하다고 역설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에 대한 담론은 특정 세력을 위해 무기화되어 있다.

  지금의 시대는 불공정한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법의 잣대도 사람에게 공정하게 들이우지 못한다. 심지어 그 법을 만든 사람들 또한 공정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지금의 시대의 어찌할 바를 몰라 법과 능력주의라면 공정할 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한다. 그것을 공정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공정의 기준은 생각보다 모호하고 또한 공정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능력,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로 얘기되는 공정은 차별을 없앨 수 없다.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작용을 놓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 능력이 좋은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된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스티븐 잡스는 직원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사원들 앞에서 모욕을 주는 충격 요법을 사용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나 우버의 임원직들 또한 그랬다. 상관의 폭행과 성추행은 공공연히 묻혔고 그들의 비이상적인 갑질은 능력 있으니까 그럴 수 있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수긍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능력은 온전한 그들의 능력 일까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미국의 경제 발전의 시대를 함께 했으며 그들을 지원해줄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집안의 사람이었다. 빌 게이츠가 위대한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의 재력 집 근처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었다는 점.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교수와 그 랩과 인연이 닿아 있다는 무수한 환경도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영재 학교나 특목고들의 입학생의 절반은 대치동 모 학원 출신들이다. 초등학교부터 외국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족집게 과외와 기출문제를 잡아주는 스타 강사에게 배우는 이들과 지방에서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 사이에 능력주의의 잣대를 대는 것은 공정할까. 영어를 즐기고 유창하게 하지만 TOEIC이 낮은 친구와 족집게 선생의 문제 푸는 방법을 듣고 높은 점수를 받는 친구 중에 누가 더 능력주의에 부합하는가?

  사회에서 공정을 얘기하려면 결국 사회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께 학비를 받아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와 알바를 해서 학비를 모아가며 공부하는 아이 사이에도 불공정은 발생한다. 모두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없다. 

  최근에는 편견을 버리고 제대로 된 인재를 뽑기 위해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한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맨 처음 실시한 곳은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라고 한다. 원래 여성이 1명도 없었지만 블라인드를 실시한 이후 여성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백인 여성이었다. 흑인과 유색 인종 그리고 제3세계 인물들은 도대체 증가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블라인드 채용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불공정함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공정에 앞서 같은 시작점에 설 수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공정 그 자체는 중요한 단어다. 공평하고 올바른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열망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공정한가 아닌가'의 문제에 매여 있다. 기득권들이 공정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연결하여 프레임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잠시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한다.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만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로 생각을 돌려야 한다. 구성원의 인권을 존중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고 윤리적인 리더를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편협하게 찌그러져 있는 공정을 조금은 더 넓은 범위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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