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것이라면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을 겪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지 UNCTAD(유엔 무역 개발회의)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분류가 바뀐 첫 사례가 한국이라는 점은 감개무량하다. GNI(국민총소득)은 몇 해 전부터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아베 정부로부터 시작된 무역보복조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고 있다. 역사적인 앙금과 오랜 시간 가져온 열패감은 승리의 감각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와 미중 무역 갈등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를 겪은 최근의 사태를 보면 글로벌 무역 체인이라고 불리던 세계적인 공급망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일본의 무역조치로 인해서 전초전을 겪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과의 무역관계 그리고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책은 더숲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피해자들의 승소로 결정 난 직후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 반도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핵심 소재에 대해 엄포를 놓았다. 글로벌 공급망에 불안 요소를 스스로 만들었고 신뢰가 무너진 약속은 대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일본에 대한 이유가 어떻든 한국이 느끼는 감정은 역사의 사실에 대한 불복이었고 힘의 논리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한국의 대표기업과 차세대 먹거리를 겨냥했다는 괘씸함은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분위기가 격화되는 가운데 기업은 새로운 전략을 국민은 불매운동으로 응수하게 되었다.
일본의 피해를 연일 보도하며 국뽕을 자극하는 미디어들의 말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 닛산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일본 지방 소도시의 관광산업이 무너진다는 것은 팩트일 것이다. 하지만 한 때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저무는 나라일지라도 여전히 그 건재함은 남아 있다.
'일본에 삼성 같은 기업이 없다. 도요타도 삼성에 대적할 수 없다'라며 국뽕에 차오를 때가 아니다. 일본에는 강소기업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팔 곳이 많다. 세계 반도체를 주도하는 삼성과 SK가 한국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회사는 스미모토나 스텔라 케미컬 같은 곳일 뿐이다. 야스가와, 미쯔비시, 파나소닉, 오므론, 키엔스 등과 같은 자동화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 시네츠, 스미모토처럼 소재 업체, 일본 전산이나 쥬켄공업 같은 모터나 기어 업체, PDI, MDI, TOKI, 히다치, 캐논, 시바우라 등 일반인은 모르는 기업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CNC(정밀가공기)는 일본의 화낙이 세계 점유율이 80%에 육박한다.
삼성전자 덕분에 EUV를 생산하는 ASML이라는 기업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장비 한 대 가격이 3000억에 육박하는 네덜란드 기업이다. 반도체 미세공정은 이 장비를 구매할 수 있을까 없을까로 정해진다. LCD 공정에서 캐논의 위치가 반도체의 ASML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는 갑에게 휘둘리지 않는 을의 기업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일본이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새다. 많은 정책들은 실패하고 있고 저온 호황으로 불리는 상황에서도 국민의 삶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급격히 늘어가는 부채 또한 부담이다. 현지화를 위해 해외로 생산 시설을 옮긴 기업들이 늘어가고 국내에 투자되지 않음으로 겪는 산업의 낙후 또한 문제다. 도요타처럼 통합형 생산에 특화된 일본이 모듈형 생산이라는 트렌드에 적응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과잉 품질과 과잉 기술이라는 일본의 장인 정신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러 지표들로 승리에 도취되어 제대로 봐야 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과 중국 사이에 갇혀 있다. 일본과 중국의 것을 모아서 만들어 파는 가마우지 경제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세계가 만들어 온 공급망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닐 거다. 그동안 양국 사이가 아무리 틀어져도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간섭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지만 유럽은 여전히 러시아의 가스를 끊을 수 없다. 세계 공급망을 위협하는 국가는 결국엔 배제될 수밖에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단기간에 새롭게 배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는 말은 투자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일본을 역전한 것은 우리가 발전한 것도 있지만 일본이 많이 후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10배 가까운 투자자산을 가지고 있고 기축통화국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령화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GDP가 늘어나고 기업은 성장하지만 개인의 삶이 어렵다. '부자국가, 가난한 국민'으로 불렸던 일본의 모습 그대로다. 자원은 없고 인재만 많은 국가 모형도 비슷하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현지화를 위해 해외로 진출한다. 선진국의 지위를 길고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 일본의 모습을 냉정하게 쳐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를 함께 엮어주어 너무 재미나게 읽었다. 익숙한 기업과 <한자와 나오키>라는 드라마 소개, 레미오로멘의 '코나유키'라는 노래 소개까지 무거운 얘기 가운데 녹아 있는 가벼움이 좋았다. (물론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성공한 이후가 가장 위험하다는 얘기가 있다. 국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본을 냉정하게 봐야 하는 지금 이 책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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