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의 나이로 작고하신 고 이어령 작가의 인생 마지막 작품집이다. 키보드를 누를 힘이 생기지 않아서 다시 펜을 쥐고 글을 작성하는 모습에서 생의 마지막에서까지 글을 놓지 못하는 문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죽음의 앞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고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내일 아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녕" "잘 자"라며 혼자 인사말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피와 땀으로 이뤄진 역사 속에서 남을 위해 흘릴 눈물 한 방울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이 책은 김영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지난 코로나를 겪으며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서양 문명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죽음 앞에 서 있었다. 걷기가 힘들어지고 소변조차 쉬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감각을 더욱 많이 느끼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였다. 죽음 앞에 서보니 지금까지 모두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모를 것이 되어 버렸다. 풀 수 있었을 것 같았던 문제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까지 나는 그 바탕을 보지 않고 하늘의 달을 보고
종이 위의 글씨를 읽었다. 책과 하늘이 정반대라는 것도 몰랐고,
문자와 별이 거꾸로 적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나는 의미만을 찾아다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의 바탕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의미 없는 생명의 바탕을 보게 된다. 달과 별들이 사라지는
것과 문자와 그림들이 소멸하는 것을 이제 본다. 의미의
거미줄에서 벗어난다.
'의미 있는'이라는 것을 소중히 하는 것은 우리에겐 보편적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던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네가 나를 길들이면...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고,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소중하게 대한다. 스치는 수많은 인연들을 인지하지 못한 채 흘러간다. 종이에 글을 쓰듯 의미는 여백을 살해할 때 만들어진다. 의미는 여백을 죽인 죄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소중히 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네 잎 클로버(행운)를 찾기 위해 세 잎 클로버(행복)를 밟고 다니고, 문명을 이끈 무명의 과학자보다 전쟁을 일으킨 자의 자손의 이름을 더 많이 기억한다. 우주의 3%인 별과 행성에 대해서만 환호하지만 나머지를 가득 채운 암흑에너지에 집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주목이라는 말은 익숙해도 유목이라는 말은 낯설다. 유목민은 아는데 말이다. 유목은 일정한 초점을 두지 않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시선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서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겠지만 그저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이 있다.
인간을 한낱 짐승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 타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다. 나의 의미만 찾아 헤매다가 주위에 많은 이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타인을 위해서 우리는 마스크를 써 왔다. 말을 줄이고 눈으로 바라봤다. 서양인들은 마치 조로처럼 눈을 가리고 입으로 떠들어 된 것 같다. (유희적으로 표현하자면.. )
일본에는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LOVE'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죽어도 좋아'라고 해석했고 나쓰메 소세키는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문화는 명사를 만들어 냈지만 그 명사를 표현하려 부단히 노력한 동사의 모습은 너무 멋스러운 것 같다. 사막에는 눈에 관한 단어가 없고 북극에는 낙타라는 단어가 없다. 그렇다고 선을 긋고 경계할 필요는 없다. 시메이나 소세키처럼 노력하다 보면 아름다운 문장을 얻게 되는 것 아닐까.
사람은 외로워지면 다른 이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외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이어령 작가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타인을 위한 눈 물 한 방울이 소중해 보였다. 문명의 발달로 언제나 이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고독할 시간이 없어서 SNS에서 그 많은 분노와 악담을 쏟아내고 있는 걸까. 지금의 시대 무엇보다 필요한 건 고독일까.
여백을 느끼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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