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정적이고 담백해 보이는 일본에 대한 감상을 잘 나타내듯 책의 디자인은 잔잔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도쿄라고 하면 서울과 마찬가지고 부산스럽고 활기가 넘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시부야나 롯폰기 만 생각해도 미어터질 것 같은 인파 속에 서 있는 느낌이라 아찔하다. 하지만 도시는 그 나라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의 것이고 그 색깔은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6년간 일본에서 에디터 생활을 한 저자의 시점으로 바라본 도쿄 곳곳의 풍경에 대한 얘기는 진풍경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도쿄 기행 정도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곧바로 만나게 되는 글은 단순히 여행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여행객의 선호가 묻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일본인들 속에서 살아가며 알아간 저자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겪고 기억하며 쌓아둔 이야기를 짧은 글과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큐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게 하나하나의 작품을 설명하듯 이어나갔다.
도쿄라는 작품은 살아있는 작품이다. 그 속에는 현재도 과거도 함께 녹아있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많은 문화와 함께 타국에서 받아 일본스럽게 만든 것들 그리고 현재가 존재했다. 저자는 도시와 자연, 물건과 가게, 일사, 맛집 그리고 도쿄를 만들어가는 크리에이터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급박하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고 먹고 하며 지나가는 곳들이 아니라 조금은 느긋하게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도쿄의 공기를 음미하는 방법'이라는 시적은 표현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들에는 일본인들의 특징과 부러움과 더불어 불편함도 있었다. 혼내(속마음)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 때문에 외국인으로서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오모테나시와 같은 진심을 넘어선 신념에 가까운 대접은 또한 감동으로 다가올 것 같다. 오모테나시가 단순한 과잉 대접이 아니라는 어느 크리에이터의 말이 좋았다. 몸이 안 좋은 단골에게 메뉴에 없는 죽 한 상을 내어놓는 요리사의 행동에서 보듯 일본의 오모테나시는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집중하는, 어떻게 보면 다양성을 인정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 이어지기란 무척 기나긴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무언가에 쉬이 빠지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은 일본의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의미가 지금의 시대에는 안 좋은 쪽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그것은 장인 정신이라는 것과도 닿아 있다. 그 행동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과학이 그렇게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집착하더라도 지지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글이 잠시 옆으로 새어버렸다. 이런 과학 덕후란..) 장인에게서부터 나오는 모노츠쿠리는 일본의 자랑이다. '좋은 물건, 좋은 정신'은 도요타의 기업 정신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의 속도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름답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이다.
섬에 살았기 때문에 문화를 내어놓는 것보다 받는 것에 익숙했고 그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현지화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원래 것도 많지만 일본화된 것도 많다. 외국의 말을 굳이 가타카나로 만들어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나갔다 싶기도 하지만 좋은 것을 받아 집요할 정도로 완성한다는 그들의 행동은 본받을 만하기도 하다.
같은 동아시아에서 인접한 두 나라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은 참 많이 다른 것 같다. 서양인들 눈에도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역동적인 느낌이 일본은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분명 이것은 취향의 차이기도 하다. 역사의 문제 때문에 오늘도 날 선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90년대에는 우리가 그들의 문화에 열광했고 2020년대에는 그들이 우리에 열광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어떻게 보면 애증의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승리 아니면 할복을 선택했던 사무라이의 정신이 그들의 정계에 뿌리내려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은 분노를 삭일 수 없게 만든다. 약탈해간 수많은 문화유산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왜일까? 그들은 여전히 한 걸음 물러서면 할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도쿄를 그들이 서울을 조금 더 잘 알게 된다면 나아질까?
용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다. 77주년 광복일이 한 달 남았다. 77년을 쌓아온 고집이 쉬이 꺾이지 않겠지만 ( 이번에도 자민당이 압승에서 물 건너갔지만) 정상적인 사과와 행동으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 피드에 댓글을 달아주는 일본인도 내가 가서 댓글을 다는 일본인의 피드에도 서로 응원할 뿐이다. 역사의 아픈 고리만 잘 정리된다면 정말 잘 지낼 이웃인데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 중)
몇 해 전 한일 합작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일본 친구들의 '쿠야시이'를 한국말로 '분하다'라고 직역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텐데 제작자의 의도적 자막인가 싶기도 했다. 우리도 그들도 미묘한 자신들의 문화가 있다. 우리의 눈으로 직역하면 오해할 부분이 많이 있다. 이 책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도 짚어가며 도쿄를 안내하고 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큐레이션이었다.
아직은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심적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면 이 책으로 여행을 달래고 조금은 이해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딱 한번 등장하는 천왕이라는 단어에 분노 중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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