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가 시작되고부터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로 분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시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시중에는 시간 관리법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게으름은 죄가 되어 가고 있다. 그야말로 '속도 숭배 사회'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다. 사회는 생각을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색이라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왜 멈출 수가 없을까?
빠른 것이 좋은 것은 그것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가 인류가 사냥을 하고 과일을 따먹던 시절에 비해 풍요롭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나 어느 곳에 집을 가질 수 있던 시절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평생 내 집 하나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누구를 위해서 속도를 늦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것들이 '슬로' 운동이다. '슬로푸드'로 시작은 이것은 '느리게 살자'의 모태가 되었다. 그럼에도 사회는 느려지지 않는다. 이미 많은 발전을 이룬 문명인데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승자독식의 사회구조는 한 걸음 늦는 것이 전부를 잃는 것이 되어 버려 느리게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삶의 속도를 줄이려면 개인의 인식과 사회의 구조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조금 느리게 살더라도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예시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 바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이다. 강력한 조세정책으로 분배 위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나라들이다. 하지만 이 나라들에도 잡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와 반대로 기득권들이 충분한 부를 획득하지 못해서 이민이 많아졌다고 한다.
지금의 사회에서 삶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혹은 그런 조절이 되는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바쁘게 살아와서 그 습성이 DNA에 기록되어 버린 듯하다. 경쟁의 사회에서 사회 전체가 느려지지 않으면 홀로 속도를 줄이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숨이 넘어갈 듯한 상태에서도 계속 뛰게 되나 보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열심히 사는 것과 빠르게 사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느리더라도 빈틈없이 채워서 살아가면 그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빠르게 사는 것은 부작용이 있다. 빠름에 적응한 우리는 조금만 늘어져도 안절부절못하지 못하고 짜증을 낸다. 짧아진 대화는 생각의 길이를 줄여 버린다. 줄어버린 생각으로 살다 보니 배려와 동정, 공감 따위를 잘하기 힘들다. 글자를 보며 사색을 하는 것보다 영상으로 들어오는 내용을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모차르트는 사라지고 EDM에 그 자리를 차지한다. 문명은 고도화되지만 인간의 뇌는 어쩌면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명상, 요가, 한 달 동안 제주 살이 같은 것들이 유행처럼 번진다. 삶 전체를 오롯이 느리게 만들 수는 없는 사회이니 하루에 어느 정도의 시간만을 느리게 사는 것이 그나마 타협이다. 사람에 따라 삶의 속도를 줄이면 큰일 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도 큰일은 날 것 같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잘 살피고 가끔씩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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