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를 졸업하고 기술직에 근무하게 되면 자연스레 독서는 '기술 서적'으로 좁혀지게 된다. 그마저도 기술에 대한 갈망이 있는 친구들이야 가능하다. 어떤 책을 먼저 봐야 하냐고 묻는 질문에는 어떤 책이든지 우선 읽어라라고 대답해 주곤 했다. 독서도 일처럼 그만두지만 않으면 항상 끝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팔 굽혀 펴기를 하는 것처럼 읽어낼 수 있는 활자의 수와 문장의 난해함은 뇌의 근력이 늘어갈수록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한동안 쟁점 아닌 쟁점이 힐링과 자기 계발에 불었다. 김제동처럼 괜찮다로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하는 다정하고 감성적인 쪽과 서장훈처럼 팩폭을 날리며 동력을 만들어주는 이성적인 쪽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장훈의 말을 좋아한다. 간절한 사람 앞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어, 지금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것은 조금 실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를 부추기고 나아가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다독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저앉거나 쓰러진 사람에게는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시원한 물 한 모금과 음식이 필요할 것이고 심하게는 링거 주사가 필요하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으면 된다. 대신 듣고 싶은 얘기를 충분히 들었다면 반대편의 얘기도 들을 필요는 있다. 세상이 바뀌고 내 마음이 바뀌듯 나에게 필요한 말은 그때그때 바뀐다. 두껍고 어려운 책이 멋져 보이지만 당장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억지로 읽어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때로 운 얇디얇은 시집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유시민 작가는 독서를 하다가 도저히 읽히지 않으면 덮고 나중에 읽어라 했다. 지식이 더 쌓이거나 생각이 바뀌었을 때 다시 읽어보면 분명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될 거다.
지금 나에게 좋은 책이 좋은 책이다.
내가 서평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잡식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집을 때에는 손 가는 대로 다양하게 보는 편이지만 더 넓게 보고 싶었다. 더불어 확신 없는 책에 자본의 투자를 줄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평을 6개월 정도는 출판사 마케터가 된 것 마냥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결론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책들은 괜찮았고 그렇지 못한 책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진흙에 진주와 같은 책들도 만나는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을 더 해내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까지 충족감을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책 선물 준다고 하면 그저 신이 나서 다 받았지만,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첫 번째 규칙을 세웠다. 개인이 요청하는 서평은 거절한다였다. 기본적으로 리뷰는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적는 편이고 정치색이 맞지 않는 책이나 철학적으로 사악하다고 여겨지는 책들에게는 혹평을 날리기도 했다. 이에 반응하는 작가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예민한 편이다. 몇 달을 고민하고 작성했을 노고를 생각하면 자식 같은 생각이 들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하지만 모든 제품은 생산자의 손을 떠나면 소비자의 냉혹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환호와 찬사도 있겠지만 야유와 질타도 존재하게 된다. 변지영 작가님처럼 훌륭하게 받아주시면 지나가며 보는 독자들에게도 분명 좋은 피드백이 될 것이고 나에게 또 한 번의 인연이 닿는다면 분명 더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독자는 책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돈과 시간을 들여 책을 읽는다는 것은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독자에 의해서 재해석되고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 독자의 해석이 작가의 생각과 무관하게 위대한 소설이 되기도 한다. 작가의 메시지를 독자가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그것은 작가가 글을 선명하게 적었거나 독자가 작가에 호감이 생겨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 많이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가끔은 작가의 생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문학 작품들이다.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나 얼마 전에 읽은 다자이 오사무가 그런 편에 속한다. 난해한 글은 많은 물음을 남겼지만 작가 존재를 알아가면 그 문장들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 시대 상황에 함께 녹아들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넘어 작가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의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닐까. 강원국 작가가 세 바퀴에 나와서 했던 말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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