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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적 행복론 (리처드 이스털린) - 윌북

야곰야곰+책벌레 2022. 4. 20.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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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로 인한 국가들의 경기 부양책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코인과 주식 그리고 부동산은 급등했다.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벼락 거지'라는 호칭이 붙어졌다. 시중에는 돈을 버는 방법을 늘리는 N잡이라는 것과 재테크에 대한 도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행복이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돈이 많아지길 원했다.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까? 소득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의 주인공인 리처드 이스털린이 들려주는 '행복 경제학'에 관한 얘기는 윌북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지금의 경제학이 19세기 의학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민한 어느 경제학자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면 수치에만 집중하는 경제학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할 것 같다. 심지어 고전 경제학을 빼면 분배의 경제학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많이 버는 것 만이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렸다. 자본 독재 시대에 기업은 있어도 인간은 사라졌다. 벌지 못하는 자는 미천하다는 사회진화론적인 생각이 만연하고 있다.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답은 '행복 경제학'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행복을 연구하는 경제학이라니 꽤나 호감이 가고 멋진 학문 같다. 행복이라는 정량적이지 않을 것 같은 개념을 측정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GDP와 같은 거시적인 숫자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의 변화를 측정하는 꽤나 미시적인 경제학이 틀림없다. 경제학이라고 하기엔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부분도 있다. 어쩌면 '통섭'이 필요한 학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비교' 다. 아래를 보고 살아야 행복하다는 옛말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의 행복은 상대적인 부분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소득이 아무리 많이 늘어도 주위 사람들과 비슷하거나 적으면 오히려 불행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지면 행복할 수 없다. 소득이 늘어도 재테크를 하는 돈이 늘어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100만 원을 벌고 주위 사람들이 200만 원을 버는 상황보다 내가 50만 원을 벌고 주위 사람들이 25만 원을 버는 상황을 사람들은 더 선호한다.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존재한다. 첫 번째는 '건강'이다. 건강은 남들과 비교하지는 않는다. 그저 과거의 나와 비교할 뿐이다.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기준에 대한 행복과 불행이 있을 뿐이지 남들과 크게 비교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특징은 대부분 남들의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자면 나만의 행복 기준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경제학자들은 인간에 행복에 대해 배우지는 않았다. 경제학에 개인의 행복을 얘기하면 이단아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행복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GDP가 국민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은 중국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북유럽의 울트라 복지 국가들의 행복도가 높은 것은 복지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지는 삶에 대한 안정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잘 살아야만 복지가 가능한 건 아니다. 코스타리카와 같은 나라에서도 복지 국가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

  행복이라는 온도가 느껴지는 단어를 경제학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시 한번 변해야 하는 시기임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성장을 노리는 경제학에는 기업에만 집중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낙수효과'는 없다는 것을.. 지난 코로나 시대에 제공되었던 '전 국민 재난 지원금'은 모두에게 좋은 정책이었다. 집이나 직장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면 세금이 50%가 넘어도 다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월세나 대출이자 그리고 구직자로 살아가며 낭비하는 돈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이다. 기득권들이 반대를 심하게 할 것 같지만...

  이쯤에서 사회주의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하다. 동유럽 국가들 중에는 자본주의 때보다 사회주의일 때 더 많이 행복했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국민의 삶을 체제가 보장해줬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은 지극히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 체제는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독재나 공산주의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실직하고 쓸모 없어진다는 느낌은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보다는 덜 할 것이다.

  북유럽의 울트라 복지 국가들을 혹자는 민주사회주의 체제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다른 이는 복지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생산성이 낮아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의 분배를 독재의 횡포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사회 환원을 하는 억만장자들은 자신의 부가 사회로부터 왔음을 안다. 부가 남들보다 자신에게 많이 왔다고 믿는다. 그들은 안다. 사회가 지탱되지 않으면 자신의 부도 쓸모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분배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라는 사회 공산체제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체제는 철저하게 거부해야 하고, 행여 그들의 체제를 인정하면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몇 해 동안 GDP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너나없이 경제가 엉망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양극화가 가져온 사회적 비교에 의한 '행복 상실' 때문은 아니었을까. 

  패러다임의 변화는 변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강력한 부를 쥐고 있는 기득권층과 세상이 조금만 변해도 굶어 죽을 것 같은 사회 약자들이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야간의 주간화, 평일의 주말화, 가정의 초토화'를 업무 지침으로 내린 김기춘의 행동에서 기득권 악랄함을 다시금 느낀다. 

  노동에 의한 소득은 소중한 것이지만, 부가 상위 1%에 흡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강제적 분배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세혈관에 피가 돌지 않으면 결국 핏줄은 터져 버린다. 약자가 되고 싶지 않음 마음은 알겠지만 분배를 거부한다고 내가 약자가 아닌 게 아니다. 사회의 부가 고르게 퍼지면 자본은 더 빠르게 돌고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게 되지 않을까. 복지와 분배는 죽어가는 자본주의를 살릴 심폐 소생술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기업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에 집중하는 경제학자와 정책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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