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사와 인간에 대한 시가 이 속에 담겨 있다. 가볍게 읽어야 하는 마음은 어느새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 준다.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근대사 많은 분들의 희생 속에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갇혀 있다. 제주 4.3을 고발하는 '한라산'을 집필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던 이산하 시인의 작품을 현재의 시점으로 다시 만나본다.
불 같이 활활 타올랐던 역사의 사건들이 모두 타버리고 지금은 재의 위에 서 있다는 표현과 이 나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우리는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라는 표현은 참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독재의 칼날에 몸이 베였다면 자본의 칼날에 정신이 베여버렸다. 입으로 진보를 외치지만 다리는 자본의 카펫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제주도 4.3 추모식에서 가수 이효리 씨가 '한라산'을 낭송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게 될지는 몰랐다고 했다. 제주 4.3으로 금기시되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비로소 유배지에서 풀려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새로운 유배지가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했다고 했다.
악의 제도 아래서 평범한 모습으로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하는 사람들에 통해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기도 했다. 히틀러 아래 그저 일만 열심히 한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생겨난 악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광주 5.18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시신을 보고 홍어라며 비웃고 좋아하는 사람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아이들이 살이 오른 꽃게로 다시 태어났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게서 키보드에 올려진 손가락에서 나오는 잔인한 폭력을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을 보여 준다며 거울을 걸어 둔 어느 동물원의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범인은 객석에도 집안에도 있지만 가장 찾기 힘든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완전한 모습에서 완벽하게 부서지는 물방울에게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고민했다. 대선 한 달 전, 그를 위해 법정에서 진술할 변호사나 문인은 없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많은 변호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이산하 작가는 준비한 200페이지에 달하는 항소이유서를 찢어버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적어냈다. 군부에 대한 도발적 저항이자 침묵하는 동시대에 항의였다.
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고 그 모습만 변할 뿐 여전히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악마의 모습이 내 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작가가 얘기한 자본에 정신이 베어져 버려서이기 때문일까. 삶이 어려워질수록 악은 더 활개 치게 될까.
나는 지금 어떤 탈을 쓰고 있는 걸까. 인생이 페르소나라지만 나를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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