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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 더스토리

야곰야곰+책벌레 2022. 4. 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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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월든'은 굉장히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되었고, 휴가지에서 읽어야 할 책에 선정되었다. 자연재해, 양극화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월든'이 얘기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월든'을 읽으며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다. 미니멀 라이프의 절정에 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법정스님의 생활은 꼭 필요한 것만을 취하셨다. 법정스님이 곁에 이 '월든'을 두고 읽으셨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삶과 철학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 곁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은 부조리한 사회 문제 때문이었다.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이는 고향 콩코드에서도 토지 임대료를 갚느라 힘겨운 삶을 사람들. 철로를 건설한 인부들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 농작물을 팔고도 식량을 구입하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무소유'를 실천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삶의 질은 형편 없어졌다. 넓은 대지 아무 곳이나 천막을 치면 가질 수 있었던 집도 엄청난 돈을 줘야 하거나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배부르게 먹지는 못했지만 굶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당당하게 문명이 발전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소로는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문명인이 추구하는 바가 야만인이 추구하는 바보다 훨씬 가치 있지 않다면,
그가 굳이 야만인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현대 사회에는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었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자부한 현대인들은 하찮은 생필품과 육체적 안락을 얻는데 대부분의 생을 바친다.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며 조금 괜찮은 집, 괜찮은 자동차를 가지는 것이 시골 어느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며 자연을 벗 삼아 여유를 즐기며 사색을 하는 삶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벽에 걸린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그림을 걸어 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자연을 보며 깨닫는 삶보다 나은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인으로 태어났다면 그중에서 가장 큰 소인이 되려 노력하면 될 것을, 그런 이유로 가서 목이라고 매라는 말인가? 라며 소로는 성공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한다. 욕심은 사람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는다. 그런 관계 속에 문명이라는 것은 철길 아래를 받히고 있는 받침대처럼 90%의 인간이 기차에 타고 있는 10%를 받치고 있게 된다. 모두가 기차에 탈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고 믿지만 기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점프할 수 있는 날이 오지만 점프하여 매달린 봉에서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를 밟고 있는 것이다.

  유충과 성충의 얘기는 참으로 정곡을 찌른다. 성충 단계의 거의 모든 곤충은 유충 단계 때보다 훨씬 적게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걸스러운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탐욕스러운 구더기가 파리가 되면 한 두 방울의 꿀 정도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탐하는 인간은 자신이 아직 유충 단계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발전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케인스주의' 적인 생각은 매일매일을 불안하게 만들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면 우리는 분명 행복해야 한다. 더 많은 발전은 하게 된다면 더 행복해질까? 이 대답에 소로는 거꾸로 생각한 것 같다. 작은 것에 행복하게 된다면 덜 발전해도 되는 것 아닌가? 작은 것에 행복하려면 많은 것을 내려두어야 한다. 그런 삶이 가능한가? 그래서 소르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월든 호수에서 자급자족을 실험했을 것이다.

  소르와 법정스님의 삶을 '무소유'라고 말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 상담 프로그램에서 자신은 물욕이 없다고 얘기한 주인공은 목표가 아파트를 구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엄청난 물욕이다. 작은 욕구는 더 큰 욕구에 의해서 봉인될 수 있다. 소르와 법정스님이 한 것은 '무소유'가 아니다. 자신을 성찰하고 정신적으로 엄청 높은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세속에 넘쳐나는 것들에 대한 욕구는 그런 '정신적 수양 욕구'에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믿는 편이다. 그러는 편이 그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명화된 우리는 이미 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터에서 봄이 온지도 모른 채 일하고 있는 워크홀릭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문명이 우리를 여름으로 데리고 가면 더위에 힘들지도 모르고 겨울까지 데려가면 추위에 힘들지도 모르겠다. 마지 지구 온난화와 빙하기가 생각나지만, 봄이 가기 전에 일터에서 나와 전 세계적으로 야유회를 한번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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