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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드볼트 (박정우 엮음) - 시월

야곰야곰+책벌레 2022. 3. 2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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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여겨지는 '시드 볼트'는 세계에 딱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 볼트이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 볼트이다. UN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으로 거듭난 스발바르 시드 볼트와 다르게 백두대간 시드 볼트는 '인류 공헌'이라는 대명제 아래 거듭나려고 노력했다. 세계에서 2개뿐인 시드 볼트라 우리나라의 시드 볼트도 당연히 국제적 지원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백두대간 시드 볼트는 경북 봉화에 자리 잡고 있다. 봉화군은 십승지라고 하여 예로부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열 군데의 땅 중에 하나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에도 전쟁이 일어났는지 조차 잘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고산 지대의 지하 깊숙이 그리고 강화 콘크리트 벽에 3겹의 강철판으로 보호하고 있다.

  시드 볼트는 씨앗을 저장하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어서 씨앗을 잠시 맡겨두는 시드 뱅크와는 그 목적이 조금 다르다. 시드 볼트에서 씨앗이 방출되는 것은 지구에 아주 큰 재앙이 발생했을 때뿐이다. 스발바르 시드 볼트에서 딱 한 번 씨앗을 방출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의 종자은행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스발바르 시드 볼트가 작물 종자를 보관하는데 반해 백두대간 시드 볼트는 야생 종자를 보관한다. 야생 종자를 보관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면서 서둘러야 하는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야생 식물에 대한 연구는 고작 10% 정도만 이뤄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연구하는 속도보다 사라지는 속도가 더 빨라 오히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드 볼트는 종자를 단순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우리나라 각처를 돌며 야생 식물을 조사하고 채집한다.

  그렇다고 모든 씨앗을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씨앗마다 휴면할 수 있는 기한이 다르다. 그래서 실제 시드 볼트에 보관이 안 되는 것들도 많이 있다. 열대식물일수록 저장이 힘들다. 채집한 종자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건조하고 씨앗이 얼마나 튼실한지도 체크해야 한다. 더불어 자생지의 정보와 함께 발화 조건 등을 테스트하고 기록하여 함께 보관해야 한다. 순수하게 종자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보를 함께 보관하는 것이다.

  시드 뱅크로도 충분할 텐데 왜 시드 볼트를 만들었을까? 어느 선진국에서도 하지 않는 일을 왜 우리는 시작하게 되었을까? 어차피 열어보지도 못하는 종자들을 많은 유지비를 들여가며 보관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이제는 그럴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식물들은 사라져 간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종자를 처리하거나 보관할 능력이 떨어져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백두대간 시드 볼트는 범아시아의 방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런 전 세계적인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나라의 가치도 함께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지라도 보관하는 종자의 수가 늘어나고 예기치 못한 환경 문제가 닥쳤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을까? 바나나만 해도 지금 멸종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재배 작물로 만들면서 식물은 다양성을 잃었다. 전 세계적으로 재배하는 작물은 30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유전자적 단순함은 천적이 나타났을 때 멸종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야생종을 보관하여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식물 주권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식물을 관찰해서 도감을 만들어냈다. 울릉도에 서식하는 식물 중에는 '다케시마'가 학명으로 붙어 있는 것들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붙어버린 이런 잔재는 고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엄청난 양의 종자를 가져갔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개량된 구상나무는 미국에 돈을 지불해야 할 정도다. 소위 선진국들의 약탈은 우리나라만의 얘기는 아니다.

  '내가 그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없더라도 나무를 심는 마음'이 시드 볼트를 운영하는 마음이라고 본다면, 환경오염으로 엄청난 속도로 망가져 가는 지구에서 살아야 할 후손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미안함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우리나라가 인류를 위해 하는 공헌이라고 생각한다면 시드 볼트를 지키는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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