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식은 아비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태티서가 들은 이 예언은 제우스도 포세이돈도 태티서에게 구애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들보다 능가하는 신이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는 얘기와 같았다. 제우스는 아비보다 훨씬 능가해도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인간에게 태티스를 중매했다. 그는 왕이었고 제우스의 손자 <펠레우스>였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는 <최고의 전사>라는 예언을 받게 된다.
브로맨스를 넘어 퀴어에 가까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는 이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최고의 전사라는 예언을 받은 아킬레우스와 모든 것이 모자라 보였던 파트로클로스. 그들의 인연은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을 괴롭히는 귀족을 밀쳐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질러 추방당해 펠리우스의 나라로 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왕자는 동무를 지정해야 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동경의 눈길을 받던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동무로 정하게 된다. 그들은 함께 지내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늘 함께 였다. 둘은 정반대의 성격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었고 그렇게 서로를 채워주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그리스가 모두 죽임을 당해 갈 때도 전장에 나서지 않았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접한 뒤로 광전사처럼 전장을 누볐다고 했다. 그런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후 둘의 관계에 사랑이 있었다는 해석이 있었고 파트로클로스는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작가는 그 점을 파고들어 대학살의 주체였던 아킬레우스에게 서사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왜 예언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처절하게 벗어나고자 했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그들이 운명에 가까워져 가면서도 도망치려 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케이론에게 배움을 받을 때의 모습은 천진난만했고 태티스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정사를 치른 후의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 사이의 감정의 선의 묘사도 좋았다. 전장에서 죽음에 대해 경험해버린 아킬레우스가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비해 케이론에게 배운 의술로 명성을 얻어가고 있는 파트로클로스의 미묘한 교차점.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진 파트로클로스와 그의 죽음에 광분한 아킬레우스. 처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브로맨스에서 나올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도 생경한 마음도 들었다.
죽어서까지 대학살의 장본인 아킬레우스로 남겨지지 않길 바랬던 파트로클로스는 사람들에게 그의 다른 면도 기억해 주길 바랐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명예였다. 최고의 전사는 단순히 전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작가도 그런 파트로클로스에게 탄복했는지 아킬레우스에게 이렇게 긴 서사를 만들어 주었다. 일리아스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위키백과만 보더라도 그의 능력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다. 작가는 분명 파트로클로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다.
두 사람은 상호보완 관계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마음일 수도 있다. 후반부에 들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니 <바람의 검심>의 켄신과 토모에가 생각났다. 한 사람은 검이었고 한 사람은 검집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검이었다면 파트로클로스는 검에게 명예를 안겨줄 수 있는 검집이었던 것이다. 켄신이 살생을 위한 칼부림에서 대의를 위한 칼부림으로 바꾼 것도 대의를 이룬 후 속죄의 삶을 살아간 것도 모두 검집의 역할을 했던 토모에의 역할이었다. 이 책에서 토모에는 파트로클로스였다.
아킬레우스의 위대함을 얘기할 것 같았던 작품이었지만 감동은 파트로클로스에게 받게 된다. 두 인물은 방황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달랐다. 어린 시절에는 특유의 밝음과 긍정적인 에너지로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를 이끌었다면 트로이 전쟁에서는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광기를 안았다. 남자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두 인물이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모습에서 오는 감동이 너무 컸다. 저자는 아킬레우스 같이 능력 위주로 인간만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파트로클로스 같은 인간도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 역시 <키르케>와 마찬가지로 단편의 조각으로 긴 서사를 만들어준 작가의 노력에 감탄을 받는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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