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야곰야곰+책벌레 2021. 8. 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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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이지만 사실 영국에서 자란 작가가 가장 영국적인 것을 그려낸 책이다. 정통이라는 것에 대한 얽매임은 앞으로 나아감을 주저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를 만들어낸다. 1900년대 초반의 영국의 스티븐스라는 집사를 통해서 여러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변혁하고 있는 세상에서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프로페셔날함만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보자면 고지식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인들도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쉬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주위 것들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것은 현대인의 고민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철학적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타고 다니는 차, 졸업장, 직업 등이 우리의 가치를 정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위대함과 도덕적 청결함으로 투영시켜 그 안에서 '완벽한 집사'가 되려 한 스티븐스의 이야기로부터 우리의 가치를 다른 것에서 가져올 때의 위험함을 알 수 있다.

  책은 달링턴의 몰락으로 인해 새로운 미국인 주인을 맞이한 스티븐스가 그간의 미덕인 집사로서의 절대적인 믿음, 복종과 헌신을 잠시 내려두고 자신에게는 조금 각별했던 켄턴이라는 총무를 만나러 가는 여행에서 생기는 에피소드와 그간의 일을 회상하며 나아간다. 여행의 권유는 미국인 주인의 권유가 있었기도 하지만 켄턴에게서 날라온 갑작스러운 편지 때문이기도 하다. 집사를 하는 동안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으나 '완벽한 집사'를 해내기 위해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지난날과 달리 그녀가 달링턴 홀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품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며 여러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겪기도 하고 자신이 모시던 주인의 행세도 흉내내보기도 했다. 위대한 집사는 위대한 신사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면서도 주인의 몰락으로 인한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은 또한 잘못된 것이라 얘기한다. 세상의 일에 의심을 품지 않고 의롭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도 복종하는 주인을 섬기는 그 자체에 대한 프로페셔널 함만 강조하다. 자신의 완벽함을 위해서 주인 또한 그런 사람이어야 했고 주인의 잘못됨마저도 철저히 자기 합리화한다.

  켄턴과의 에피소드는 정말 답답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집사로서의 품위를 지키려고만 했던 충직한 종복으로서의 삶이 안타까웠다. 집사의 가면을 벗는 것이 꼭 혼자일 때여야만 하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켄턴을 향한 서로의 사사로운 감정이 끊어져서 많이 답답했다. 버스를 타고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 지나간 나날들을 뒤돌아 보며 켄턴에 대한 자신이 마음을 깨닫는 것 같았으나 남아 있는 나날 또한 집사로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그는 마지막까지 사사로운 감정을 감춘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강할수록 변화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 함께 흘리는 가는 것이 때로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세상을 느끼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세상에 관심을 줄 때 우리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900년대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낯설고 꽤 높은 집중력을 요구했다. 글에서 눈의 초점이 자주 어긋나는 것은 눈이 피곤했던 것인지 집중력이 자주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숨겨 놓은 의미와 함께 피곤함도 함께 만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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