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인류는 모두 노마드였다. 모두가 자연을 벗 삼아 그 속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며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려고 했다. 그 속에서 인류는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그들의 생활은 자신이 필요한 이상의 것을 탐하진 않았을 거다. 그런 삶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노동으로 (혹은 집약적 노동)으로 삶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그런 노마드적인 삶의 방식을 흠모하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자연선택이라면 또 자연선택일 것이니까.
역사의 빛과 어둠이 있다면 노마드의 역사는 어둠이다. 자유로운 이들에게 기록은 의미가 없었다. 노마드의 삶을 쫓는 이 책은 까치글방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인류 문명의 흔적은 모두 정주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 정주를 하고 있는 우리 인간의 흔한 생각이다. 농사와 정주를 시작해야 생산과 노동이 성립하고 그렇게 생긴 잉여 생산과 노동으로 유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믿음은 깨져 버린 것 같다.
그곳은 수렵 채집을 하기에는 너무나 풍요로웠던 땅이었던 것 같다. 마치 자연이 농사를 지어놓은 듯한 곳. 성경 속 에덴의 동쪽일지도 모르겠다. 정주가 시작되지 않은 인류 역시 거대한 유적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목민 그 자체로도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애초부터 검증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늘 문명지와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본다. 그야 그럴 것이 가장 많은 사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주한 국가들은 강한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들었고 그들의 역사를 서사를 남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기 때문이다. 정주한 인류에게는 과시욕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한 곳에 살기 때문에 그 투자가 아깝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목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짐을 뿐이다. 그들은 늘 움직이기 때문에 단출하다. 책과 도서관은 취약한 것일 뿐이다. 차라리 노래를 불렀다. 성경과 꾸란이 같은 곳에서 나왔지만 꾸란이 더 리듬감이 있는 이유가 바로 말로 전해져 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목민의 역사를 더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정주 국가에 남은 야만인의 기록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사마천의 <사기>,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뿐만 아니라 각종 제국에 남겨진 야만족(혹은 오랑캐)라고 불리는 이들의 기록을 더듬다 보면 중앙아시아를 가득 매운 스텝지역이라는 그림자 속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는 정주한 인류의 역사에 비해 모자람이 없다.
평야를 이루는 지역을 일컫는 스텝이라는 용어는 고대 사회를 보면 굉장히 중요하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황하 문명 사이를 잇는 것이 바로 스텝지역이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 조건은 문명 발전을 가속화시켰고 가로로 넓은 땅은 문명의 교류와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말'의 등장은 노마드의 중요 키워드가 되었다.
인류가 말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은 압도적인 기동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고 스텝 지역은 바로 말을 키우기에 너무나 적합했다. 기마부대는 총과 대포가 보급되기 전까지 압도적인 무기이기도 했으며 무역을 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정주 국가를 위협했던 수많은 노마드 국가가 바로 말의 힘을 빌렸다.
중국은 훈족에게 유럽은 오스만 제국에 세계는 칭기스 칸에게 휘둘렸다. 그들은 힘만 과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이동을 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 주업인 노마드에게 그들만의 세상이 열렸다는 건 실크로드와 함께 세계 무역의 활성화를 의미했다. 그렇게 보면 노마드는 단순 유목민이 아니라 세상을 잇는 사람들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정주하는 국가가 많아질수록 노마드는 미개인 취급을 받아왔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자연으로 회귀를 외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목주의에서 멀어진 사라들의 삶은 노동의 증가와 비슷한 삶의 방식을 강요받았다. 첨단 기술이 발달한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더 많은 노동과 함께 건강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디지털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유목민이 생겨 났다. 바로 '디지털 노마드'다. 자유롭게 이동하며 원격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도시로 몰리던 사람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디지털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자신을 몰아가면서 현실에서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갈 일은 먼 듯하다. 몸은 조금 자유로웠을지 모르겠지만 정신은 어느 한 곳에 묶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사회이기에 어쩌면 유목민의 삶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에 맞서지 않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철학이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ps. 사실 책 내용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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