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혹은 정열의 색인 빨강은 색을 3 원소 중에 하나며 자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색이기도 하다. 동시에 빨강은 피의 색이면서 이슬람의 색이다. 동시에 세밀화에 사용되는 물감으로는 꽤나 귀한 색이기도 했다. 빨강은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점에서 제목에서 주어 '나' 또한 중의적일 수 있다. 강렬한 첫 문장으로 유명한 이 소설답게 제목 또한 예사롭지 않다.
튀르키예 작가라는 말보다 이스탄불 작가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그의 작품 대부분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장 잘 아는 것을 써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튀르기예 중상층의 생활 그리고 이스탄불에 대해 적고 있다.
콘스탄티노라고도 불리는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이면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강고한 성벽과 지리적 이점으로 그 상징성이 높은 도시다. 메흐메트 2세가 함락시킨 후 줄곧 오스만의 수도의 역할을 했다.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전하는 곳,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뒤섞인 곳인 이스탄불은 한때 세계 문화의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시대가 저물고 서양의 근대화에 뒤지는 바람에 오스만의 역사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도시는 그 슬픔이 내려앉아 있다. 강성했던 제국의 국민은 서양의 빠른 근대화를 지켜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옛 영광을 찾을 수 없겠다는 비애로 물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던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담았다. 엘리트층이라고 불릴 수 있는 네 명의 세밀화가의 섬세한 심리 표현을 통해 시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전통이라는 틀에 갇힌 채 살아온 네 명의 세밀화가는 새로운 변화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니시테 에펜디는 베네치아의 화풍에 감동을 해 서양화를 그리려 한다. 네 명의 세밀화가가 눈치채지 못하게 각자에게 그림을 맡기게 되고 그것들이 하나로 모여지면 전통화 전혀 다른 서양식 그림이 되는 것이었다.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 그것을 알아챈 화가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명이 살해된다. 그의 이름은 엘레강스다. 첫 문장에 등장하는 우물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가 바로 그다.
작품은 에시니테의 딸을 흠모했던 카라를 등장시킴으로써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와 다시 이어지고 싶었던 카라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작품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스토리 전개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또한 각 챕터마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마저 자신의 입장을 얘기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흥미를 더한다. 심지어 살인자도 나타나 자신의 입장을 말한다.
범인을 찾아가는 범죄물의 바탕에 세큐레에 대한 로맨스가 올려져 있다. 그리고 전통을 고수하는 대표적인 인물 오스만과 변화를 원하는 에시니테 대립시켜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밀화가의 심리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야기의 곳곳에는 역사의 증거들이 남겨져 있고 작품의 흥미는 어느새 오스만이라는 제국에 대한 흥미로 옮겨져 가게 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살인자의 말에 동화되어 가던 찰나에 그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면 괜히 슬프기까지 하다. 문화가 융통성을 잃어버릴 때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된다. 한때 화가를 꿈꾸던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묘사가 머리에 그릴 수 있을 만큼 섬세한 것은 또 다른 재미를 가져다준다.
전통과 변화, 서양과 동양의 대립각을 세우는 곳에서 만날 수 있는 부조리함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을까. 문화의 용광로가 되지 못하고 소모전만 겪었던 후기 오스만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작가는 '동양의 것이든 서양의 것이든 모두 내 것이다'라고 얘기했던 신의 이야기를 빌려 지금 튀르키예에 필요한 것이 통합이라고 얘기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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