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싸울까? 그리고 폭력성이 사라지는 건 문명화의 과정인가?라는 질문은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 스티븐 핑커 교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이 깨어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아자 가트의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문명과 전쟁>에서 전쟁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더욱 자세히 서술한다. 인간에게 폭력성은 줄어들고 있지만 그 이유는 복합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쟁을 국가 단위로 정의하고 이것을 하나의 발명품처럼 취급하게 되면 우리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국가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 체계를 얘기하지 않고서 전쟁을 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전쟁은 그저 규모가 커진 다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나타난 이래 가장 긴 시간이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이 싸우고 있기에 정말 평화로운 시대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며 옛날 제국의 싸움이라고 불릴만한 전쟁은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욕구를 실현하는데 쓸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다. 협력, 경쟁, 분쟁이다. 인간의 욕구에는 기본적으로 전쟁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를 발화시키는 여러 요인으로는 폭력의 기대효용, 죄수의 딜레마 등이 있다. 폭력과 전쟁이 다른 방법보다 인간 욕구를 채우는데 유리하다면 전쟁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쟁의 시작은 역시 <부족한 자원>에 있을 수 있다. 전쟁 자체는 자원의 소멸로 이뤄지지만 승자에게는 꽤나 이득이 생긴다. 약탈뿐 아니라 번식에도 유리하다. 동아시아의 Y염색체 중에 칭기즈칸의 유전자는 6%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아니더라도 승자에게 주어진 특권은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전쟁은 국가적인 입장에서도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동기가 충분했던 것이다.
자원 경쟁은 자연에서 공격성과 치명적 폭력의 가장 우선되는 원인이다.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간 경쟁은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자원의 가치가 높을수록 치열해진다. 초식동물이 먹이를 두고 싸우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자원을 두고 협력하면 분명 이득이 되지만 인간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원이 풍부한 21세기에도 군비 경쟁이 끊이지 않는 것 또한 바로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처럼 태생적으로 강하지 않기에 불안이 높다. 넓은 초원에서 낮잠을 자는 사자와 같은 여유가 인간에게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무기는 그것을 더욱 강화했다. 무기만 있다면 건장한 성인도 갓난아이에게 살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탄생, 홉스의 리바이던의 등장은 전쟁을 줄이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서로 믿지 못하던 인간은 친족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종교를 만들어 더 큰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미화되어 있지만 종교는 남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사회 내 경쟁은 억압되었다. 그리고 전투의 손실은 더욱 커졌다. 물론 경제적 이유로만 전쟁을 하진 않지만 원정을 나가는 것은 분명 나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맬서스의 덫>에서 구해줬다. 자원의 폭발적인 증가는 인간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전쟁으로 얻는 것보다 무역으로 얻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가 연결될수록 성장은 폭발적으로 이뤄졌다. 전쟁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어쩌면 전쟁의 형태가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패권국에게는 딜레마였다. 높은 성장을 위해서는 무역을 개방해야 하는데 후진국의 추격 속도에 불을 지펴주는 것이기도 했다. 전범국인 독일, 일본에게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했던 이유도 세계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한 패권국의 수였다.
하지만 빠른 추격은 패권국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선택한 무역 장벽은 결국 독일과 일본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자급자족의 민족주의의 발화였던 것이다. 그러고 지금의 미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중국의 거대 시장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미국은 무역 장벽을 세우는 듯하다. 이 결과가 세계 통합이 될지 비민주주의 진영의 부활을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 또한 민주주의 진영과 너무 복잡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탄생으로 생긴 상호확정파괴는 일정 부분 전쟁 억제의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업이 가져온 '풍요'다. 배부른 사람은 전쟁하려 하지 않는다. 가진 걸 잃을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미국 덕분에 전 세계로 퍼진 민주주의는 이런 국민의 성향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전쟁은 언제부턴가 비호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켜도 되는 명분을 찾는 것이 정말 어려워졌다. 그리고 선진국 대부분은 민주주의 진영이다.
넘쳐난 풍요는 일부 많은 국민에게까지 퍼졌고 사회는 개인의 삶과 행복 추구가 더 중요시되어 갔다. 집단을 위해 목숨을 바쳐라는 것은 이제 비인간적인 요구가 되었다. 게다가 개방된 성문화는 호전적인 젊은 남성들을 더 이상 전쟁터로 보낼 이유도 없애 버렸다. '전쟁 대신 사랑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사회가 노령화되며 젊은 남성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험은 있다. 풍요를 가지지 못한 제3세계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의 붕괴(파키스탄 같이)는 테러 집단에게 핵무기가 들어갈 수 있을 여지를 준다. 핵무기는 적어도 붕괴되지 않을 강력한 국가를 가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좋다. 테러집단은 일본의 오옴진리교처럼 스스로 생화학 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여전히 화가 난 사람들이 있기에 불씨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풍요는 늘 끝이 있다. 지금의 시대가 세계화로 가는 돌파구가 될지 하락의 시작이 될지는 모르겠다. 팬데믹과 미중 무역 전쟁은 세계화를 단절시키고 민족주의와 자급자족의 형태로 돌아서게 만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지금의 정치 체제가 아니라면 영토가 쪼개질 위험이 있어 민주 진영으로 들어올 가능성도 낮다.
전쟁은 결국 등 따시고 배불러야 억제된다. 아프리카나 중동 또한 먹을 걱정 없다면 전쟁할 생각 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쟁도 좋지만 두루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인간은 진정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외계인이 침범이라도 해야 할까.. 참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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