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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읽기 (박찬국) - 세창미디어

야곰야곰+책벌레 2023. 6. 2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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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웅동체의 생물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생물은 암수로 나눠져 있다. 그것이 진화에 유리한 측면이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하나가 되려는 욕구는 본능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성욕이 충족되지 못한 상태를 고통스러운 긴 상태라 보면서 이것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프롬은 그것만이 본질이라고 한다면 자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랑은 굉장히 복잡하고 힘든 것일 수 있다. 사랑은 공포처럼 본능에 충실하지 않다. 사람은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연습해야 한다. 사랑은 이성에 의해서만 완결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쉽게 풀어쓴 이 책은 세창미디어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본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본능의 강력함이 사라졌기에 인간은 욕망의 통제할 힘을 잃어버렸다. 배가 부른데도 더 많이 먹게 되고 발정기가 아닌데도 성욕에 사로잡힌다. 약해진 인간은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기 쉬우며 이를 위해서 이성의 힘을 길러야 한다.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하면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고립감'을 느낀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형태인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지극히 엄격하게 사용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사람과의 결합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서도 또 각가의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여기도 양자역학인가)

  사랑에 필요한 세 가지는 적극적인 관심, 책임, 존경이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사랑은 욕망으로 변해 버린다. 참된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며 상대방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데서 오는 큰 기쁨이다. 자신이 상대에게 기쁨과 쾌락을 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이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부모는 고통과 우울을 느낀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자는 부자일 수 없다. 가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주는 기쁨'을 빼앗기 때문이다. 

  분노와 증오는 따로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배울 필요가 있는 이유는 휘둘리지 않기 위함이다. 반대로 사랑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할 상대를 택할 때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조건을 따지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고 상대로부터 그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실망한다. 사랑은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강렬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판단과 약속, 즉 의지와 결단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이 감정에 불과하다면 영원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완숙한 인격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자신의 리듬이 아닌 일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를 유아적인 방종으로 해결하려 한다. 현대인들이 사랑의 훈련을 기피하는 이유는 바로 '무노력, 무고통'이 훌륭한 삶이라고 퍼지고 있는 사회 현상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에서 해방되면서 오히려 나태해지고 노력을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가 생겨 났다. 고통은 부정적인 것이 되었고 사람은 고통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스스로 행해야 하는 훈련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나타낸다. 관심과 노력 그리고 인내가 수반되어야 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며 한 순간의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수많은 SNS의 '좋아요'는 현대인들이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기보다 '사랑받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나르시시즘은 그저 이기주의일 뿐이며 이타주의는 자기기만이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자기애를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세상을 사랑하려 하게 된다.

  수동적인 자세는 종교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선인들이 말한 '사랑'을 행하는 이는 거의 없다. 주중에 사랑하지 못했음을 주말의 기도로 면죄부를 받는다.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기도보다 자신의 안위에 대해 기도한다. 이는 부모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달라고 떼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식이 자라면 부모를 떠나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듯 종교도 그래야 한다. 

  행복이란 욕망을 충족시킬 때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감각적 쾌락주의에 빠지게 된다면 쾌락만을 위한 물질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쾌락이 없어질까 불안하며 주위를 모두 쾌락의 수단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 같은 삶'이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주의는 결국 우울로 향한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상대의 세상을 경험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환희가 행복한 상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을 구현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많은 범죄들이 잘못된 사랑의 방식에서 출발한다. '인내의 뿌리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속담이 마치 권위주의적인 표현이 되어 버리고 있지만 우리는 결국 힘을 들여서라도 배워야 한다. 사랑의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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