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1Q84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야곰야곰+책벌레 2023. 5. 30. 17:13
반응형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선> 이후로 처음 만나는 이 책은 사실 아내가 구입해 둔 책이다. 벌써 14년이 지난 책이다. 책 아래편에 2010년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아내는 그 해 이 책을 모두 읽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의 1Q84 열풍을 간접적으로 느꼈던 것은 나만 빼고 아내나 처제들이 모두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업무로 바빴을 당시에는 읽지 못한 이 책을 14년이나 지난 지금에 읽어 본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약간 정적이고 아리송했던 기억인데 이 책은 완전 다른 느낌이다. 그 사이에 나의 읽기 능력이 향상된 건지 하루키의 스타일이 바뀐 건지는 잘 모르겠다. SF적인 요소에 미스터리가 더해져 있는 스토리는 아주 정교하게 쌓여 있다. 여러 가닥에서 시작해서 하나로 묶어내는 기술은 일본 여러 작가들에게서 만나는 기법이지만 하루키만큼 정교하게 해내는 작가는 많지 않다. 

1Q84는 얼핏 보면 1984로 보이며 그것은 옳은 시각이다. 1984에 약간 뒤틀어진 세계 1Q84. 작가는 왜 이런 세계를 만들어 냈을까. 스토리 중간에 보면 조지 오웰의 1984가 언급되며 빅브라더의 존재가 부각된다. 실제로 1Q84에서 리틀피플의 말을 듣는 '선구'의 리더는 어쩌면 빅브라더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야기를 리틀피플로부터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리시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리틀 피플'일까?

빅브라더를 비판하는 리틀 피플도 그들이 세력을 만들게 되면 빅브라더와 다르지 않다는 부조리함을 들려주려고 하는 건 아니었을까. 여론이 빅브라더를 움직이는 사회. 그것은 지금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리틀 피플의 목소리가 늘 정의일 순 없다. 잔인하고 멍청한 군중은 때론 사회를 어지럽힐 수 있다. 하루키는 그런 모습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리틀 피플'은 <마루 밑 아리에티>처럼 선하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후카에리가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기 때문에 리틀피플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선구'는 새로운 리시버가 필요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대리인을 찾는 리틀 피플은 익명에 자신을 감추고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인터넷 속의 무법자들과도 닮아 있다. 

하루키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을까. 하루키는 평생을 NHK 수금원으로 일했던 덴고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빌려 그 메시지를 전한다. 숨어 있지 마라. 숨어 있어도 누군가 반드시 찾아낼 거다. 단순히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설정이었을까 싶었던 이 관념체의 목소리는 작가의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끝까지 숨어 덴고를 감시했던 우시카와는 결국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의지로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한 아오마메에게는 그 세계를 선물했다. 

희망이 있는 곳에 시련은 존재하지만 희망은 너무 추상적이고 시련은 지긋지긋할 만큼 구체적이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용기는 우둔한 군중 속에서 나의 모습을 되찾는 방법이다. 군중의 나는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 속에 나는 없고 더없이 잔인해질 수 있고 또 그 화살은 언제든지 나를 향할 수 있다. 하루키는 나를 잃지 말자는 메시지를 숨겨두고 있는 건 아닐까.

글 쓰는 사람 덴고에 투영해서 글 쓰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자세와 글의 모양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는 하루키는 압도적인 짜임새, 군더더기 없는 문장. 짧지만 읽기 편한 문장과 3권까지 늦추지 않는 긴장감. 어느 하나 아쉬운 게 없을 정도 잘 썼다. '문장은 얼핏 보기엔 단순하고 무방비해 보여도, 세심하게 읽어보면 상당히 주도면밀하게 계산되고 다듬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문장은 하루키가 추구하는 문장을 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했고 모든 문장에는 의미가 있었고 무심코 던진 떡밥도 제대로 회수에 가는 꼼꼼함을 잃지 않았다. 읽으며 '혹시'라고 하는 부분은 '역시'로 이어져 주었고 그런 소소한 재미마저도 잘 살린 작품이었다. 큰 재미와 작은 재미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좋은 책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