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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필립 드와이어, 마크 S.미칼레) - 책과함께

야곰야곰+책벌레 2023. 4. 30.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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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균쇠>, <사피엔스>로 대표되는 인류의 빅스토리는 얇지 않은 책이지만 한 권에 인류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이슈가 되었고 또 많이 읽혔다. 하지만 이런 긴 역사를 서술하는 책에 대해 반론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학문이 걸쳐 있는 이런 책들을 반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쩌면 시간 낭비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도 비슷한 위치에 있다. 많은 반론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기도 하다.

  핑커 교수의 선한 천사의 역사학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이 책은 책과함께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비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선하다'라는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대체로 원하는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성악설보다는 성선설이 믿고 싶은 이야기며 그런 맥락에서 우리 속의 천사를 옹호하고 싶어 진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일고 난 뒤에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안도감이랄까. 그것을 반박했을 때 마주해야 하는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학회에서의 갑론을박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중서로 대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극적인 제목과 전투적인 서문에 비해 학자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는 젠틀했으며 그들만의 논리를 정확하게 펴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스텐스는 핑커 교수의 서사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정확한 데이터의 사용과 해석이 필요하며 누락된 데이터들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의 분노는 핑커 교수가 자신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짓밟고 무시한 나머지 역사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역사 연구 또한 과학 연구와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불확실성의 원리'는 많은 학자들이 우유부단하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만들지만 증명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자세는 중요하다. 역사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여러 사료를 살펴보고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기존의 역사와 다르게 최근 역사의 트렌드는 약자의 역사를 연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사료는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며 이들은 패한 자의 역사를 왜곡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어느 하나 단정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핑커 교수의 도전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폭력의 역사성에 대한 연구는 꽤 오랜 과제였고 이런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 핑커 교수는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을까?

  첫째로 폭력의 정의다. 폭력은 시대에 따라 그 정의가 변화해 왔다. 핑커 교수가 정의하는 폭력은 오늘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면 그것 또한 의지에 의한 폭력. 즉 살인에 대한 데이터와 잔인성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반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살인이 고대의 살인과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 중세 가톨릭의 순교를 생각해 봐도 그것은 폭력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주 적은 몇 가지 사실로 폭력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의지가 없다면 폭력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다. 

  두 번째는 폭력의 가변성이다. 폭력은 그 형태와 모양을 바꿀 수 있다. 돌도끼가 검이 되고 총과 미사일이 된다. 모두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폭력들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뤄지는 폭력의 형태는 조금 다르다.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가져왔고 자연 파괴라는 심각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의 세대의 폭력을 다음 세대가 맞게 되며 선진국이 휘두른 폭력이 글로벌 사우스로 향한다. 이를 '느린 폭력'이라고 하며 '마멸적 치명성'이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들은 선진국들이지만 그 피해는 여전히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 받게 된다. 우리가 일으킨 기후위기는 다다음 세대들은 힘겹게 견뎌야 한다. 너무 먼 이야기라 우리의 폭력은 눈에 띄게 사라져 보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폭력의 형태는 자신으로 향하는 폭력이다. 외부로 분출되지 못했던 폭력은 자신을 향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핑커 교수는 자살에 대한 언급하지 않는다. 자살은 시대가 흐를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것을 본성과 연결시키긴 쉽지 않지만 핑커 교수가 말한 자본주의의 취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고립과 우울증 그리고 공황장애를 선물했으며 높은 자살률로 보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를 선두로 세계 각국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만한 지도자들이 선출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더욱 폭력적으로 바뀌고 있다. 

  세 번째는 계몽주의다. 계몽주의는 아주 넓은 범위를 아우르고 있지만 핑커는 자신이 계몽주의를 이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그 외의 계몽주의에 철저하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성'의 가치를 주장하면서도 '감정'에 기댄다. 소설과 에세이가 가져다준 심리적 공감능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문명화 이론'이다.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은 역사학자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책으로 깜짝 놀라만 한 사람은 아니다. 예절고 매너는 폭력을 줄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했지만 나치즘과 같은 파시즘에 대해서는 그냥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파시즘을 일으킨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 엘리트 층이었다는 사실과 오랜 시간 쌓여온 문명화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깨어지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누락하고 있다.

  중세 유럽은 핑커 교수가 말한 것만큼 잔인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경우는 문명화가 느렸음에도 유럽과 같은 잔인한 고문과 형벌이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차르의 말이 즉시 시행되기 바랐기 때문에 '즉시 처형'했기도 했고 넓은 땅을 이용한 유배와 노역을 이용하여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도 했다. 폭력이라는 것은 국가 권력의 목적에 맞게 쓰이는 것이다. 모든 폭력은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은 하나일 수 있다.

  핑커 교수의 역사 인식은 휘그식 역사주의다. 인류는 진보하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목적론적 역사 해석을 한다. 이는 경제적으로 보면 케인스주의랑 닮아 있다. 인류는 진보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역사학자는 이런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계몽주의는 근본적으로 문명인과 미개인으로 나누게 된다. 문명의 꽃을 먼저 피웠던 서양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제국의 침략의 명분이며,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그 기록 속에는 누락된 기록이 너무 많다. 이 점은 핑커 교수도 언급하고 있다. 단지, 역사학자는 사료를 찾아 하나씩 검증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핑커 교수는 샘플링과 비율로 퉁친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한 사회의 사료가 다른 사회로 넘어갈 때에도 그 해석은 새롭게 해야 한다. 핑커 교수는 그 점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것들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을 때 드는 불편한 부분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핑커 교수의 허점에서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걸까? 내가 느끼는 폭력성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그랬던 걸까? 우리는 점점 더 선해지고 있다는 서사 아래 짓밟힌 작은 (혹은 작지 않은) 역사의 아픔에 대해 이 책은 분노하는 것 같았다. 그 점은 핑커 교수도 얘기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만 피해는 약자의 것이다. 

  기획자는 '자극적'인 프레임을 설정했지만 책은 오히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제대로 읽기 위한 부록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여 혹함에 끌려가는 생각에 전환점을 만들어 준다. 이 책을 읽으면 보다 풍성한 생각이 들게 될지 모른다. 인간이 착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폭력은 그 형태를 바꿔가며 우리와 대적하고 있다. 핑커가 말한 "새로운 평화"는 어쩌면 "새로운 전쟁"으로 불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세상은 오늘도 자연에 대한 폭력, 약자에 대한 폭력, 사회를 부수려는 폭력등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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