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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라스무스 평전 (스테판 츠바이크) - 원더박스

야곰야곰+책벌레 2022. 11.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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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라스무스>라.. 이름이 낯익은데 잘 기억나질 않는다. 때마침 창비에서 장바구니를 비워주는 이벤트가 있어 장바구니를 뒤지다가 찾았다. 에라스무스는 교육자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광기가 흐르던 시절에 철저하게 중립적인 입장만을 취했던 신학자면서 철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안위만 살피던 도망자였을까 극단주의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던 정신적 지주였을까. 가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학문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고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정신은 혼돈의 세월에 철저히 비난당했다.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으로 에라스무스라는 위대한 학자와 인문주의의 평가를 나눠 볼 수 있다.

  바람 부는 들판에 홀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정신. 극단주의에 저항하고 모든 사상과 학문에 대해 포용력을 갖췄던 진정한 중립자의 모습을 원더박스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오직 학문과 라틴어에만 관심이 있었다. 사제였지만 사제복을 입지 않으려고 애썼고 어떤 권위에 닿으려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모든 이념에 대해 수용할 자세가 있었고 그것을 나누는 정신적인 노력을 사랑했다. 극단주의는 전쟁을 불러오고 그것은 대부분의 민중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되는 사람은 몇몇의 소수일 뿐이고 민중들에게는 삶의 파괴만 주어진다. 철저한 극단주의 배제 그리고 많은 이념의 수용은 이기적이며 제국적인 것이 아닌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그의 개인적 소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큰 이상이 있어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바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왠지 인간적이다.

  정의의 정신 속에서 해소되는 대립. 그것을 꿈꿨던 인문주의 낙원은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며 논쟁에 휩쓸리는 것을 싫어했던 신학자는 자신의 명성과 경의를 마다하지도 않았다. 삶의 안위 속에서 학문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었던 것 같다. 평화로운 시대에 학문의 높이는 많은 존경을 받겠지만 격동의 시대에는 자기 면피를 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격렬하게 외칠 때에도 문제는 토론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지지했지만 그의 행동은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교황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줄곳 타락한 가톨릭을 비판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도 부당한 평화가 훨씬 낫다"라는 키케로의 말을 옳다고 여긴 에라스무스는 "동물들이 서로 공격한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무지를 용서할 수 있다"라고 했지만 인간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폭력은 맹목적이며 목적도 없다. 그저 폭력을 부추기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폭발할 뿐이다. 인간은 두 부류 나눌 수 있고 그것은 교육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다. 참된 인간이 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의 인문주의는 그 교육이 대중에 닿지 못했다. 인문주의 학자들은 좁은 범위에서 서로 만족했을 뿐이다. 인문주의의 실패는 대중에 파고들지 못함에 있었다. 그에 비해 마르틴 루터는 뼛속부터 평민이었기에 그의 웅변은 민중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싸우려 하지 않는 자는 싸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모든 면에서 월등했던 에라스무스였지만 사람을 움직일 힘은 없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적임자임에도 어떤 중재의 장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저자는 에라스무스를 찬양하려고 작성하지 않았다. 인문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고 에라스무스를 양쪽 측면에서 평가했다. 세상을 회피하고 자신의 안위만 살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죽는 날까지 어떤 극단주의와도 결탁하지 않은 순수한 중립 주의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두 번의 절판이 있었고 다시 발행이 되었다. 승자독식 사회로 변해버린 세상은 <군주론>이 이끌었다. 아니, 군주론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모호하고 어중간한 것을 싫어한다. 극단적인 이념은 사람들을 잘 휘어잡을 수 있다. 그 통쾌함은 히틀러라는 괴물에게 환호하는 대중을 만들어 냈다. 다시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고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세상의 다양한 모든 것을 품어 내고자 했던 '에라스무스다움'을 꺼내 읽어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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