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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카밀라 팡) - 푸른숲

야곰야곰+책벌레 2023. 4. 12.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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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제목과 추천글을 떠나 무작위로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책을 만나기 위해서다. 자페 스펙트럼을 가진 저자가 쓴 너무나도 철학적인 제목. 솔직히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너무나도 즐거웠다. 과학덕후가 아니면 '뭘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건조하고 진지한 글 속에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너무 진지해서 더 웃기면서도 더 많이 슬펐던 이 책은 푸른숲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발달 범주에 따라 병명을 구분하였던 병명들 독립된 장애가 아니라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으로 판단한 뒤부터 사용되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이 증상은 세상에 좀 더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이 책의 저자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수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책의 깊이로 보아 우영우에 뒤지진 않을 것 같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에겐 우영우 이상의 흥미로움으로 가득 찬 책이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처리하고 이해하기가 더욱 힘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세상을 편견 없이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 발생했을 때를 구분하기 힘들다고 했다. 저자는 그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공식처럼 해석될 수 있는 과학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구세주와 같지 않았을까. 절묘하게 해석되는 과학의 이론들을 보며 저자의 대단함과 함께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이 있어왔을까 하는 아림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 사용 설명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불가능하다. 알면 알수록 더 많이 생기는 질문 때문에 절대적으로 충분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훌륭한 정보가 아니지만 늘 시작할 만큼은 충분하다. 내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미 모은 정보를 통해 해석하고 가치를 만들어갈 뿐이다. 똑같은 외모가 똑같은 성격을 말하지도 않고 똑같은 행동과 말이 똑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AI가 인간의 영역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까? 마치 슈퍼 AI 같은 저자의 글에서 초지능의 미래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이어놓은 과학과 사회의 끈은 정말 기발할 정도다.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줄기세포에서 분화했기에 그 기원은 같다. 그저 조금 다르게 분화했을 뿐이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자. 신생아가 18년을 자라야 완성되어 가듯 하루아침에 서로를 이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내심을 가지자. 인간의 관계도 생물과 같아서 자라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서로에게 관대한 처음에 비해 사이가 깊어 갈수록 상대의 행동에 엄격해진다. 무지가 행복이라면 지식은 책임을 뜻한다. 상대방에 대한 증거가 축적될수록 공감에 대한 욕구는 빠르게 증가한다.

  세상에는 0과 1과 같이 나뉘는 일은 거의 없다. 빨간 소파를 살지 파란 소파를 살지 같은 문제에 옳은 답은 없는 것과 같다. 우리에겐 퍼지 집합 사고가 필요하다.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고방식으로 논쟁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그저 상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는 tan(탄젠트)로 설명할 수 있다. 안정기도 있지만 무한히 닿질 못하는 어려운 영역도 분명 존재한다. 인간관계는 공유결합처럼 다소 느슨하기도 하고 이온 결합처럼 서로 부족한 걸 채우주는 강한 결함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라는 건 수소결합처럼 공유결합, 이온결합 양측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물처럼 다채롭고 다재다능한 모습을 띄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중력처럼 약하지만 어디에서나 미치는 끌림에 놓여 있으며 전자기력처럼 불꽃 튀는 로맨틱한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강력에 의해 강하게 결합되기도 하고 약력에 의해 서로 헤어지기도 한다. 우리의 관계는 이런 힘뿐만 아니라 환경 변화에 의해서도 생긴다. 모든 화학 결합은 깨진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가이다. 물이 뜨거울수록 소금은 더 잘 녹는다. 물은 얼음이 되기도 수증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우리는 머신러닝처럼 꾸준히 학습하고 베이즈이론처럼 가진 증거로 확률을 계산하기도 하며 의사 결정 나무처럼 수많은 선택지를 따라간다. 우리는 실수했을 때 오류를 생각하고 시스템의 실패로 결론 내리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대게 평범하다. 그저 예측된 시나리오에 대해 다른 작용이 있었을 뿐이다. 1분의 차이로 기차를 놓칠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쌓아온 의사 결정을 모두 포기해야 할 만큼의 증거가 될 순 없다.

  우주의 엔트로피는 자연스레 증가하기 때문에 우리의 방은 지저분해진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우리의 방이 깨끗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원하는 질서를 위해서는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한정된 에너지를 쏟을 것을 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물론 나의 질서와 타인의 질서는 서로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는 '평형 상태'를 찾을 필요가 있다. 물론 나 자신과의 타협에도 평형감각은 중요하다. 

  인간은 개인의 진폭을 가지고 있다. 저자도 자신만의 진폭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자신의 진폭을 증폭시켜 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상쇄시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무조건 같은 진폭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 건 아니다. 나의 진폭이 흥분 상태에 닿을 때 이를 감쇄시켜 주는 진폭을 가진 사람도 필요하고 진폭이 약해질 때 이를 증폭시켜 줄 사람도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고 감싸주는 진폭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과학철학의 진면목을 보는 듯한 책은 읽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거의 모든 과학 지식을 담은 책이면서도 너무 철학적이다. 무덤덤하고 건조한 문체가 그런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굉장히 어려운 과학 지식도 인간사에 빗대니까 너무 쉽게 다가왔다. 과학 덕후에겐 철학에 대한 얘기를 철학자에겐 과학에 대한 설명이 될 법한 글들로 가득했다. 글과 함께 실려 있는 그림들은 너무나 절묘해서 웃음이 날 정도로 감탄스럽다.

  내 존재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감성적 렌즈를 내려두고 과학적 렌즈로 바라본다면 자신의 존재는 그저 확률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피드백을 적용하여 개선하면 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이해하려고 편 책은 나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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