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은 뒤 3월 26일 중국 여순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사형 선고일이 밸런타인데이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형 선고일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나 또한 지나가며 만난 카드 뉴스가 아니었다면 서거일에 대해서 무겁게 생각해 보질 않았을 것 같다. 서경덕 교수의 안중근 의사 서거일 기억하기 캠페인은 그런 면에서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안중근 의사 서거일을 맞이하여 그동안 민족의 역적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의 용기와 행동에 대한 감사를 뒤로하고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까 싶다.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조금 다른 부분에 있다. 그의 집안은 나라를 구하는 일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안중근은 왜 이토를 암살하려 했을까? 민족의 암살자였을 그에게 일본 순사들은 왜 그렇도록 감동했을까? 정답은 사형이 내려지는 날에도 자신의 '인'이 부족하다며 항소를 포기하고 작성했던 '동양평화론'에 있지 않을까?
일찍이 동양은 문학에 힘쓰고 제 나를 지켜내기 위해 힘썼고 서구의 땅도 침입해 빼앗은 적이 없다. 허나 서구 열강들은 도덕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무력을 일삼으며 폭행과 해악을 일삼는다. 일본이 만주대륙에서 러시아를 때려눕힐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의 마음이 일치해 원수를 갚고자 했음이다. 러일 전쟁의 승리는 서구를 몰아내고자 했던 동양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동양 대통합의 기회를 걷어차버렸다. 스스로 전체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는 동양의 나라이면서 서구 열강과 같은 행동이다. 주변국에 대한 일본의 원망과 증오는 이런 배신감에 기원한다. 일찍 히 동양은 상대국을 파멸시킬 정도로 약탈하지 않았다. 숭배받기만을 원했고 조공을 받으면 그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주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짓밟고 나아가는 야만의 역사는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가지고 있다. 한중일이 유구한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분열된 뒤에 다시 합쳐질 수 있었던 중국의 역사도 이런 동양의 기질에 바탕을 하고 있진 않을까.
안중근 의사의 입장에서 동양평화를 해치는 일본 군국주의의 앞잡이 이토 히로부미는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음이 분명했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구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을 넘어 한중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도 일본의 학자도 그에게 감동하고 그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소학교 교과서에는 안중근 의사를 우리나라보다 비중 있게 다루는 모양이다.
허나 엎질러진 물. 극동의 세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느라 바쁘다. 세 나라의 지난 원망이 풀려 돈독한 관계가 된다면 서구 열강들은 바짝 긴장할 것이다. 세 나라의 생산량, 인구, 경제, 문화 어느 것을 놓고 보더라도 세계에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한반도 평화를 흔드는 것도 이데올로기로 불안을 조장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세 나라가 친할 수 없게 하려는 전술 같다. 한중일 세 나라가 EU와 같은 공동체를 결성한다면 그 파괴력은 실로 가공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일본의 전체주의자들이 꼬아놓은 실타래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품질 좋은 실도 그것을 엮어낼 기술도 아름다운 디자인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꼬여 버린 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일본의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원망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실타래를 푼다고 가위로 난도질을 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원망이 증오가 되는 과정이 될 뿐이다.
이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뜨거운 열기 속에 막을 내린 월드컵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향한 노무현 대통령.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언급할 것이냐는 주위의 우려 속에서 일본 국회 연설을 했다. 일본 의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마무리되었던 국회 연설은 모두가 승자였다. 나를 낮추지도 않았고 상대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미래의 큰 그림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것의 열쇠로 과거사 문제를 언급했다. 물론 보는 방향에 따라서 시원하게 얘기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순 있다. 하지만 민감한 문제일수록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대통령은 일본 TV에 출현하여 일본인들과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아베가 정권 안정을 위해 꺼내 들은 강한 반한 감정의 부추김은 그 후로 쉽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상대가 몰아친다고 고개를 숙일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라 대 나라로 서로 대등하게 마주하고 협상했을 때야 말로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굽신거리면 얻은 평화는 일방적인 파괴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3주기를 맞는 올해. 여전히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못하고 아시아 동쪽 끝에 고립되어 있는 일본이 안타깝다. 어릴 적 일본 문화로 많은 즐거움을 가진 나로서는 일본의 진정성 있는 반성만 있다면 언제든지 좋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을 좋아하는 일본인들과는 여전히 사이좋게 얘기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 김영환 충북 도지사가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물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이웃나라를 좋아한다. 소비하는 문화나 여행객 수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는 분명히 해야 한다. 일본 자신들의 표현인 도게자(土下座, どげざ) 정도의 진정성 있는 사죄라면 나 또한 기꺼이 친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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