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이 국가 추모일이 되는 듯했으나 이번 정부는 또 한 번 뒤틀고 있다. 뉴라이트에 물든 정권이라서 그럴까 이승만의 과오가 명확한 이 사건을 덮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다. 잔인했고 아팠던 역사만 알았을 뿐이다. 제대로 추모해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던 나에게 이번 정부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만든다.
제주 4.3은 오키나와 학살과 어느 정도 이어져 있다. 특히 오키나와 학살은 동북아 평화라는 대명제 속에서 민간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과 미국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원래는 류큐라는 왕국이었으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전쟁은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하는 꼴을 당하느니 일왕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하라며 주민에게 수류탄을 주었다. 하지만 불발탄이 많았기에 주민들은 대부분 서로가 서로를 때려죽이는 참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아비규환을 빠져나온 주민이 본 것은 잔인한 미군이 아니라 멀쩡히 살아 있는 일본군이었다. 죽음일 피하기 위해 동굴로 숨어든 주민을 일본군은 미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세 살 이하 어린이는 입을 막아 죽일 것을 명령했다. 민간인은 전쟁을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광기와 공포로 내몰렸다. 인구 59만의 오키나와는 18만 명을 잃었다.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J-POP의 여왕이었다. 안티가 없을 정도의 그녀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녀는 '기미가요'가 부활하던 1999년 11월 12일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 10주년 기념식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당시 일본 사회는 그녀의 침묵에 경악했다. 소속사는 그녀가 오키나와 출신이라 '기미가요'를 몰라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현 지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추모글을 남긴 것은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제주 4.3은 멀게 보면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싸웠던 일본군은 오키나와에서 밀려 제주도에서 항전을 준비한다. 다행히 종전이 선언되면서 제2의 오키나와전은 생기지 않았다. 미군은 제주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주목했고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일제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했다.
해방을 마치고 제주도에도 6만 명의 청년들이 귀향을 했다. 그들은 고향에서 자치활동과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미군정 중대와도 사이가 좋았다. 북제주군은 지역 교육 수준 조사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해방 후 항일운동자 출신들이 조직을 운영하기 시작하며 친일파를 제외하고 좌/우파 모두를 참여시키며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은 나빠졌다.
제주 4.3을 폄하하려는 집단들은 지속적으로 '남로당'과 '북한'을 언급한다. 하지만 제주 4.3은 바로 3.1절 경찰의 발포 사건을 시발점으로 한다. 이 시점으로부터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해방을 맞아 감격의 만세를 불러 보아도 태극기가 있어야 할 자리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냉전 시대는 남과 북을 점점 더 멀게 만들고 있었다. 이에 1947년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에서 운동이 일어났다.
"통일독립 전취하자!"
기마경관의 말에 아이가 치였는데 그대로 가려 하자 사람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 대답은 총탄이었다. 6명의 민간인이 숨졌고 8명이 총상을 입었다.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가 이뤄졌다.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 대신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미군은 색안경을 끼고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했다고 분석했다. 제주는 붉은 섬이 되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고위 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로 교체했다. 극우청년단체 서북청년회는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많은 청년이 일본으로 떠났고 동굴등에 은신처를 마련했다. 1948년 3월에 3건의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고, 2월에는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며 민심은 거세게 요동쳤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탄압 저항, 통일국가를 막는 단독 선거에 반대하며 무장봉기를 시작한다.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 그러나 사태는 악화되어만 갔다.
평화 협상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사건'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불을 질렀고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군정이 촬영했다. 지금은 우익의 "평화협상 방해 공작"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를 이용한 미군정의 태도가 더욱 의심스럽다. 오라리 방화 사건, 고작 이틀 뒤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라"라고 명령했다.
미군정은 온건적인 작전이 필요하다는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했다. 5.10 남한 단독 투표에 제주 주민은 반대를 했고 선거 관리위원들도 사퇴를 했다. 유권자 50%를 넘지 못해 제주는 5.10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죄가 있건 말건 선거에 방해된다며 미군정은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들였다. 주민들은 마을마다 보초를 세웠고 청년들은 무조건 달아났다. 잡히면 연행되었다. 한 달 동안 검거된 사람은 6천 명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6.23 재선거도 무산되었다. 남한에서 선거가 유일하게 보이콧된 지역이 제주였다. <뉴욕타임스>는 '청소하는 작전에 착수했다'라는 보도기사를 내었다.
이승만 정부에게 제주는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곳이었다. 미군 또한 제주도 소요사태를 빨리 끝내기를 독촉했다. 제주 4.3은 송요찬 연대장이 '해안선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면서 이미 예고되었다. 그곳에는 1백여 마을이 있었고 수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80%에 이르는 지역에서 '초토화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이것은 국제법으로도 금지된 것이다. 이 작전으로 가축은 물론이고 가옥 4만 여 채도 불탔다. 파병명령을 받은 여수 14 연대 일부 병력이 "동포를 죽일 수 없다"라며 일어난 여순사건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선포된 계엄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를 적극화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 등을 가혹하게 탄압하라"라고 국무회의에서 명령했다. 미군은 제주도 진압작전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다. 한국의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에게 "송요찬 연대장이 대단한 지취력을 발휘했다. 이 사실을 대통령 성명을 통해 알리라"라고 공한을 보내기도 했다.
4백여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북촌리 학살사건'처럼 가혹한 진압작전에도 제주 상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8천여 명이 산에서 내려왔다.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부녀자들이었다. 하지만 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판결문도 없는 상태에서 1660명을 선고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형무소 수감저와 예비검속자들을 대상으로 불법 처형을 자행했다. 많은 시신들이 수장되거나 암매장되었다. 유해 수습을 나섰지만 유골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기에 그 신원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산포경찰서의 문형순 서장은 총살 명령을 거부했기에 수백 명의 목숨을 살렸다.
제주 4.3은 남로당이라는 단어 하나로 아주 오랜 시간을 오해받아 왔다. 이승만의 과오를 덮기 위한 그들의 노력도 분명 이런 진실을 찾는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철만 되면 북풍으로 재미를 봐야 했기에 제주 4.3은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다.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가해자인 미국의 입장은 무엇인지, 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오랜 세월 속에서 든든해졌다. 그러나 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는 제주 4.3 같은 과거사 문제도 진솔하게 풀어야 한다."
찰스 랭글 전 연방 하원의원은 한국전 참전용사이면서 뉴욕주에서 46년간 재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UN 본부에서 4.3 인권 심포지엄에서 발언한 찰스 랭글 의원의 말은 깊은 울림이 있다.
한국의 평화를 담보하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오키나와'에 대한 외면, 대한민국 건립을 위해 제주도를 희생양으로 삼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대학살. 냉전체제 동아시아의 시간을 견디며 지니 왔던 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대중 패권 전쟁 속에서 국가는 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이 문제를 우리는 지속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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