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 로마의 역사가 있다면 동양에는 한나라의 역사가 있다. 서로마가 시시껄렁하게 멸망했다면, 한은 흐지부지 사라졌다. 한을 공중분해 시킨 네 명의 역적을 꼽는다면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 다. 역사는 그들을 망탁조의라고 부른다.
한의 몰락을 가져온 네 명의 인물과 함께 어리석은 지식인들에 대해 알아보는 이 책은 가디언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한의 역사는 초한지에서 시작하여 삼국지로 끝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로 소설이며 원래의 삼국지는 따로 있다.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해져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를 가리키게 되었고 원래 삼국지는 정사삼국지라 불린다.
망탁조의는 자신의 나라에서 녹을 먹다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던 역적을 일컫는 말이다.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시해까지 했지만 황제에 오르기 전에 죽음을 당했다. 조조와 사마의는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었을 뿐 황제를 폐위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체 오르고 새 왕조를 열었다.
왕망의 평가는 대사마에 올라 실권을 장악했던 때까지와 직접 새 왕조를 세운 후로 나뉜다. 마치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듯하다. 어려서부터 유교에 빠진 왕망은 어떻게 보면 근본주의자다. 항상 겸손하고 검소했으며 차남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자 자결하도록 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대사마에 오르자 바로 황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실행한 개혁은 가히 친 민중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너무 이상적이었고 기득권층에 방해로 실패했다. 권력 자체가 무너진 왕망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근본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 게 아니었을까? 이상은 권력 없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게 아닐까. 자신을 내던져 세상을 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너무 미화시키는 느낌은 없지 않지만 이런 해석을 달지 않으면 이중인격자 같은 그의 기록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역사가들의 해석처럼 철저히 연기를 했던 것일까?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근본주의자가 된다.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한다. 그 강요가 공격성을 띄면 도덕성이 사라진다. 도덕성이 사라지게 되면 그들의 가치도 무너진다. 목적이 정의롭다고 해서 과정이 이해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어디에도 복속되지 못한 왕망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동탁은 사실 다른 이들과 논할 만큼 큰 인물은 아니다. 그저 운 좋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기록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조조와 사마의는 큰 사람이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녹을 먹던 인물은 스스로 황제가 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몇 대가 지나서야 황제를 폐위시키고 '위'를 열게 된다.
한의 소멸은 위진남북조라는 혼돈의 세계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기나긴 분열의 역사였지만 다시 통합을 이뤄낸다. 아직까지 새로운 통합을 이뤄내지 못한 서로마와는 다른 길을 갔다. 400년이 가까운 분열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소개하는 어리석은 지식인들은 서로마의 몰락에 영향을 준 어리석은 권력자들과는 조금 다른 접근이다. 그들이 한의 몰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통해서 당시 지식인들의 풍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있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법가의 사상을 따르고 또 좋아한다. 하지만 일단 성공하면 법가의 풍모를 숨겨야 한다. 세상을 조금 더 평화롭게 다스린다는 분위기를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자는 지식인들을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중용하곤 했다.
무릇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강태공 같은 풍모를 풍긴다.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속세에 발을 들이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고 무엇보다 큰 뜻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그저 권력을 잡을 수 없었기에 강태공 흉내를 내고 있지 않았던가 싶다. 누구든지 권력으로 진출할 기회만 있다면 주저 없이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지식인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세치 혀를 함부로 놀렸다. 하지만 결국 칼을 들고 있던 손에 목이 배어졌다.
세상은 상대의 생각을 알지 못한 자를 실패한 자라 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 했다. 명분이 지식인의 혀에 있더라도 칼은 위정자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주위를 돌보지 않던 어리석은 4명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재주가 뛰어나나 뾰족하여 상대방도 찌르지만, 자신도 찔리는 사람.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과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나 스스로도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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