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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 민음사

야곰야곰+책벌레 2023. 3. 2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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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대에서 강연을 의뢰받은 파묵이 틈틈이 작성한 이 글은 그의 글쓰기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글을 쓰는 그는 의식을 따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분석적인 면이 있다. 그는 건축학을 전공했듯 글의 구조를 모두 짜놓은 뒤 채워 넣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화가 되려 했던 그는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소설과 소설을 대하는 작가와 독자의 이야기가 심오하다.

  우리가 소설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인간의 습성에서 기인한다. 모순되는 두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소설은 허구이면서도 진실이라고 믿는 독자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소설에는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들을 '소박한 사람', 반대로 인위적인 부분이 있다고 믿고 특별히 관심을 두는 이들을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작업이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작품을 읽고 작가는 그런 독자의 의도를 파악하며 글을 쓰게 된다. 텍스트를 마주하고 벌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체스 게임 같은 것이다.

  소설 읽기에 대해 알아보면 우리는 소설에 대해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독자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마주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는 무엇인지 이해하려 합니다. 머릿속에는 항상 어딘가 있을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등을 찾으려 애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단어들을 그림으로 전환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단어를 그림을 전환하는 과정을 즐긴다는 것이다. 

  독자는 글을 읽으며 작품의 어디까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인지 궁금해 하기 시한다. 허구와 실재의 모순이 소설의 생명력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특별한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라며 인식하기도 한다. 때론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리곤 자신이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 이 달콤한 착각은 소설이 가지는 힘을지도 모르겠다.

  도작의 이런 면을 살펴보면 소설은 읽는 사람이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어야 한다. 소설 속의 풍경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은 서로 관련성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전체 풍경 속 모든 세부 사항을 사건과 관련된 주인공의 감정, 심리 상태와 연관 지어 읽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플롯이 필요로 하는 드라마와 사건의 전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이야기와 플롯은 작가가 설명하고 싶은 여러 상황을 연결하는 어떤 선이며, 주인공은 이를 구체화하는 동시에 잘 설명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일일이 동일화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소설이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독자의 '시각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시각적 서술'과 '단어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단어적 서술'이이 그것이다. 호메로스는 '시각적' 작가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수많은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에드거 앨런 포는 '단어적' 상상력에 호소하며 '창작의 철리'를 썼다. 물론 어느 한편에만 의지해서 쓰는 작가는 없다. 

  소설 쓰기는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이다.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작가의 단어로 자신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이다. 눈앞에 떠올린 이미지가 오로지 단어로 옮겨졌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법을 배울수록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단어적 사고의 중심부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으른 독자를 위해 장면의 생각과 감정까지 말해버리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독자의 상상력을 믿고 오로지 단어로만 설명하는 작가들이 있다. 소설가가 소설을 '실현'시키려면, 부지런하게 상상력이 작동하는 통찰력과 인내심이 있는 독자가 필요하다. 이런 사회적 구조가 잘되어 있는 서양의 작가들은 이 부분을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도덕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에 살고 있는 작가들에게는 미묘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소설은 박물관 같은 특성이 있다. 생각을 일깨우는 것보다는 간직하고 보존하며 잊히는 것에 저항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가 공허하고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중 무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에서 자긍심과 행복을 느낀다. 소설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우리의 지각이 만나는 순간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묘사하고 가볍게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 속에 의미를 담고 독자와 치열한 숨바꼭질을 하려 한다면 이 책은 아주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파묵의 글쓰기에 대해 알고 싶어 펼쳤지만 한 번 읽고 덮기엔 아쉬움이 많은 책이다. 파묵에 대해 알아 갈 때에도 조금은 더 깊이 있는 글을 적고 싶을 때에도 다시 열어보게 될 책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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