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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김영사

야곰야곰+책벌레 2023. 3. 1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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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떠들썩했던 사피엔스를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의 두근거림은 학문의 연결이 그리고 그것의 해석이 이토록 통찰력 있을 수 있고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똑같은 수준의 무언가가 마음을 덮쳤다. 인간은 왜 이럴까?라는 단순한 궁금증은 있었지만 그 질문에 이렇게 심오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일까? 인간의 역사를 통한 여러 가지 면을 들여다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더불어 독서의 방향 혹은 정리의 방향을 다시 한번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세간에서 사피엔스를 인용할 때에는 항상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다.' 이 구절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언급하지 않은 채 자극적인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책 전체를 읽어보면 농업혁명은 수많은 혁명 중에 하나였을 뿐이며 유발 하라리는 그저 역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 연계가 너무 자연스러워 결국 농업혁명은 지금의 인간을 만들어 냈고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되돌아갈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인간을 제외한 최상위 포식자는 늘 여러모로 강력했다. 들판에 앉아 있는 사자는 두려움이 없다. 그에 반해 인류는 진화의 고리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최상위 포식자에 올라섰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인지혁명'이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능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을 상대도 똑같이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서로 믿는 것은 종교와 자본을 가능하게 했다. 

  관계로 이룰 수 있는 구성원은 50 ~ 100명 수준이다. '우리'와 '그들'로 나누려면 공동체의 대부분을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면,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가 될 수 있다. 작게는 세계에 곳곳에 있을 팬덤이나 특정 소비를 하는 마니아들, 더 나아가서는 국가나 민족이 그러하다. 인류는 대규모의 협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문제의 농업혁명은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이유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저 밀이라는 것을 재배하게 되었고 인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게 되어 그 굴레에 갇혀 버리는 것 같다. 농업을 시작한 이유는 '이제부터 농업을 해야지'라고 다짐으로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의 신체는 농업 이전의 사회에서 더 좋았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수렵인의 크기가 되었다고 하니 농업으로 인한 편식이 인류에게 얼마나 해로웠는지 알 수 있다. 종교적 사원을 짓기 위해 밀을 경작하게 되었던지, 숲을 불태워 나무보다 밀이 자라기 편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업이 인류에게 재산을 만들었고 외부의 침입에 도망가지 못하고 싸우게 만들었다.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었다.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하며 오늘 채찍질하게 되었다.

  농업 혁명은 인류를 정착하게 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아이를 놓게 되었다.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였고 도태된 자 또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 났으며 소수는 엘리트로 나머지는 기술과 문화에 이바지했다. 농업 혁명은 우리를 커다란 굴레에 들어서게 했지만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재산은 약탈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는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계에 순수하게 전통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수많은 제국이 지나간 자리엔 서로 섞인 새로운 문화만 있을 뿐이다. 어느 시대까지가 우리의 문화라고 선을 긋는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전통문화는 우리 족속이 침탈당한 또 다른 제국의 문화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렇기에 제국은 인류를 통합시켜 왔다. 서로가 서로의 문화였던 것을 전통처럼 보존하고 있기도 하니까. 

  종교 또한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가진 종교는 일신교와 다신교 그리고 이신교가 있다. 서로의 종교를 신을 인정하는 다신교에 비해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일신교가 득세하는 이유는 다른 신앙에 비해 광신적이며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도 일신교라고 하기 어렵다. 한 명을 신을 모시고 있지만 귀신도 유령도 무서워하는 신자들이다. 그 속에는 천사도 악마도 있다. 예전 일신교를 추앙하며 신상을 파괴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일신교 속 다신교도 그렇게 통합되었다. (신도들은 그렇게 믿지 않을지도)

  세상은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나가 되어 간다. 마치 무질서가 사라져 가는 엔트로피와 닮았다. 사회 속의 엔트로피인가? 200개가 넘는 나라는 언젠가는 모두 EU와 같은 구성이 되었다가 지구 공동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반세기 전부터 인류는 폭발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를 '과학혁명'이라고 한다. 과학 혁명은 무지에 대한 인정이며 더불어 세상을 글이 아닌 숫자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이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신은 알고 있다고 믿었고 모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현자들도 그 내용은 전혀 몰랐다. 기린의 목이 길어지고 올챙이 뒷다리가 생기는 걸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찮은 것을 연구한다며 폄하되었다. 하지만 과학은 제국과 함께 무지를 인정했다.

  바다 건너에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대륙이 있다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 '제국'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모두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과학의 절묘한 만남은 과학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과학은 '진보'라는 개념을 인류에게 안겨 주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또한 그 결실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신의 문턱을 넘으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것을 해낼 수 있는 이 시기에 우리는 멈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행복한가? 에 대해서. 다윈의 적자생존에 따르면 지구 위에 인간과  더불어 가장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는 소, 돼지, 닭은 성공한 종족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비참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종족의 마지막임을 알고 있는 코뿔소보다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어떤가? 행복의 척도가 생화학적 반응이라면 행복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아지겠지만, 행복이 일정한 물질적 벌이에 있다면 인류의 행복은 증가했을 것이고 공동체 속의 편안함과 연결에 있다면 분명 불행해졌을 것이다. 인류는 행복의 척도를 측정하려 들지만 정확한 방법은 미지수다. 이제껏 그것을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고민은 새로운 혁명 앞에 서 있는 인류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언젠간 한계에 부딪치는 날이 올 것이다. 물론 과학은 또 한 번 그것을 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류 멸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명공학, AI 등과 같은 기술은 이제 인간을 신의 문턱에 세웠다.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인류의 멸종을 인류 스스로가 스위치를 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일으켰던 수많은 멸종을 사례로 볼 때 인류가 지구 생태계에 저지른 만행은 참담하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그다지 정의롭지도 못하다. 인류는 인류 자체에게도 그렇게 호 의롭지 못할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참담함 속에 피어난 인류애는 점차 동물애까지 넓혀지고 있다. 우리의 다음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룩한 범죄(?)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은 가지고 살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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