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575호의 화두는 '큐레이션의 시대'다. 나는 Know-How의 시대 태어나 Know-Where의 시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마저 없애려는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머릿속에 지식을 넣고 살았던 시절에는 오래 산 이의 지식이 곧 지혜였다. 노인들은 존경받을만했다. 글이 생기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우리는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야말로 '찾기'를 잘해야 하는 시대에 살았다. 이제는 AI와 빅데이터로 인한 수많은 추천 알고리즘으로 우리는 '추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식의 양이 방대할수록 취사선택의 문제는 중요해졌다. 책만 해도 그렇다. 읽어야 할 책이 백과사전과 세계문학전집뿐이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에서만 일 년에 6만 7천 권이 쏟아져 나온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인터넷은 어떤가? 글과 영상이 쏟아진다. 좋은 것들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시대에 등장한 것이 '큐레이터'다. 예전에는 신문과 잡지에서 그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광범위 해졌다. 큐레이션을 큐레이션 해야 할지 모를 웃픈 상황이 연출되고 만다. 그리고 강력한 적이 나타났다. 바로 '추천' 시스템이다. AI가 하는 '큐레이션'의 등장이다. 나의 흔적을 좇아 나에게 맞춤 추천을 해주는 시스템. 가끔은 놀랍지만 가끔은 얼토당토 하지도 않다. 큐레이션의 시대에서 제대로 된 지식을 얻는 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을 이번 호는 얘기하고 있다.
큐레이터는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직업이다. 쏟아지는 책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를 좋은 책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직업이다. 그 선택에는 개인의 취향이 관여를 하겠지만 큐레이터는 독자의 해석과 성찰의 영역을 남겨둔 채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해야 하게 된다.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유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추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유'라는 단어와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찾아가야'했던 지식은 '다가오는' 지식에 비해 힘들다. 사람들은 이제 '다가오는' 정보에 익숙해지고 있다. 정보 수집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 정보만 소비한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살면서 더 좁은 지식 소비를 하는 모순적 삶이다.
우리는 '추천 알고리즘'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극히 상업적인 것이다. 나의 관심사를 저장해 두었다가 점점 자신의 상품으로 유도하는 신종 마케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추천은 새로운 형태의 가스라이팅이다. 너는 이걸 사야 한다는 새로운 형태의 포지셔닝이다. 편협한 지식 소비를 하면서 오히려 자기 확신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불완전한 확신이며 오히려 아집이 될 소지가 있을 뿐이다.
추천 알고리즘에 갇혀 버리는 현상을 '필터 버블'이라 한다. 필터가 만들어주는 세상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편협한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의 반대편의 관점, 생각, 가치, 신념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양쪽을 모두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그럼에도 나의 것이 나음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냥 철벽을 쳐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양극화와 분열의 씨앗이 된다. 필터 버블은 개인이 주체성을 기를 수 있는 토양을 오염시킨다.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선택'이라는 고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너무 많은 자유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한다. 선택지를 줄여 나가는 것은 삶을 편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구와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의 편리함은 인간이 유혹당하기 좋은 형태이기도 하다. 편함을 얻는 동시에 우리는 사고력을 잃게 되겠지만.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 스스로 속박되어 간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알고리즘의 독재 아래로 줄 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보 과잉 사회에서 정보를 가지지 못하는 불안한 감이 이를 더 부추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거나 의지가 부족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정보는 개인의 불안감을 덜어 줄 것도 분명하다.
우리가 알고리즘의 가스라이팅에 벗어나려면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첫 째는 그것은 상업적이다. 상업적이라는 말은 개인 친화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 째는 알고리즘은 나의 과거를 기반으로 하거나 대중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심코 관심이 생기는 것을 알고리즘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들을 추천한다. 대중을 같은 방향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추천의 시대에 우리는 우연히 마주치는 즐거움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큐레이션이 분명 필요한 시대임이 분명하지만 알고리즘의 추천에 생각 없이 따라다니지 말고 그들의 추천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정말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능일 것 같은 시대에 비판적 사고는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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