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찰나'를 뜻하는 단어여서 물리량으로 따지자면 '0'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아차'하는 순간에 과거가 되어 버린다. 사실 과거와 미래만 가지고 얘기하여 큰 문제가 없을 만큼 현재는 아주 작은 양이겠지만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가장 큰 값이 된다.
현재를 정의하려면 시간을 정의해야 한다. 뉴턴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을 정의한 뒤 물리학을 설명하였다. 고대 물리학에서는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였지만 현대에 이르며 그의 정의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아진다. 예를 들면 빛의 속도는 일종의 '제한 속도'와 같아서 뉴턴의 생각과 달리 뛰어넘을 수 없는 속도다. 사실 뉴턴도 절대 시간에 대해 증명하지 못했다. 절대 시간이 있다면, 우리의 시간 여행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걸까..
"선생님, 애가 질문을 했는데 모르시면 어떡해요? 정말 명문대 출신 맞으세요?"
"어떻게 시간을 모를 수가 있어요?"
"어머님, 그것은 뉴턴도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만..."
과학 커뮤니티에서 공유된 하나의 에피소드는 지금도 생각날 만큼 웃기다.
그럼에도 시간의 개념은 중요하다. 우주의 발생을 얘기하는 빅뱅을 설명하려고 해도 시간의 개념이 필요한 것 같다. 뉴턴의 생각과 달리 시간은 대부분 상대적으로 측정된 것이라는 것이 보통의 의견이 된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출발점이 된다. 시간은 그저 측정되는 값인 것이다.
시간은 사건과 사건 사이의 고유시간이다. 시간은 관찰자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이론과 법칙을 설명할 때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다. 시간이라는 것은 변화의 결과이며 이 변화는 볼츠만이 제안한 '엔트로피'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엔트로피가 0이 되면 우주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우주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이 멈춘다는 것과 같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현재'는 그저 너와 나의 '동시성'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인지할 만큼의 사건이라고 할까?
생물학적으로 보면 시간의 존재는 '기억'에 의지한다. 나의 기억이 쌓이면서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한다. 어떻게 보면 시간은 의식의 산물이다. 이를 의식시간이라고 얘기한다.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현재', 미래는 '기대로서의 현재', 현재는 '지각으로서의 현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시간은 우리의 의식작용의 의한 것이다. 의식의 양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모두 같은 공간에서 변화를 지각하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기준이 되는 시간이 존재하는 듯하다. 우리의 의식의 동시성이 존재하기에 '현재'를 얘기할 때 이질감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에서 본다면 '철학적 현재주의'는 심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연시간이라고도 얘기되는 이 시간은 과거와 미래는 없고 그저 현재만 존재한다. 자연에는 그저 '지금' 그리고 '지금' 뿐이다. 무한히 늘어선 연속적인 어딘가 서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시간과 수를 동일시했다. 수는 헤아리려는 순간 수가 되며 시간은 헤아리는 순간 지금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곳에 인간의 의식이 작용한다. 헤겔에 따르면 '지금'은 '직관된 생성'이며 이는 무에서 존재로 바뀌는 과정이다. 생성은 발생이기도 하고 소멸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미 없거나 아직 없으면서 있다'
이렇게 따져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 크기는 0이라고 할 수 있고, 의식하는 순간 생성되며 바로 과거가 되어버리는 결국 또 양자역학이 되어버린다. 존재하지만 관측되는 순간 수만 남고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현재라는 것은 빛으로 설명해서 이미 과거의 빛이고 감각기관이 인지한 과거를 뇌가 분석해 놓은 결과다.
시간의 개념은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모두 치열하다. 우리는 공간 내부에서 공간을 관측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우주 밖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절대 시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빅뱅이라는 태초의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우주 안에 갇혀 있다는 것도 사실이며, 그러기에 상대적인 시간의 개념 또한 중요하다.
법정스님은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무상의 바다 위를 흐르는 덧없음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꽃 같은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였다. 찰나의 시간을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시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씀하셨다.
현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건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다시 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는 것이 시간의 위에서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 + > 생각 | 잠깐 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대면 사랑은 대면 사랑과 무엇이 비슷하고 다를까? (1) | 2023.02.17 |
---|---|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학습된 즐거움일까? (0) | 2023.02.16 |
왜 늘 입을 옷이 없는 걸까? (0) | 2023.02.15 |
성공의 99%는 그저 '보여주면' 된다. (0) | 2023.02.14 |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0) | 2023.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