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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학습된 즐거움일까?

야곰야곰+책벌레 2023. 2. 1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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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즐거움이 뭐냐라고 질문을 받으니 말문이 막힌다. 즐겁다는 마음의 표현을 정의하려고 하니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감정은 굉장히 광범위하기도 하고 때론 개인적이기도 하다. '쾌감이나 만족을 주어 기분이 좋다'라는 사전적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느낌적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즐거움과 같은 선 상에 놓고 볼 수 있는 단어는 '기쁨'과 '좋아함'이 있다. 기쁨과 즐거움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기쁨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결과의 감정'이라면 즐거움은 그 '과정의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기엔 둘 또한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즐거움은 학습된 걸까? 소위 '기분이 좋다'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 혹은 유전자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일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쾌락인 섹스의 경우도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에 좋은 기분을 내도록 DNA가 설계되었다.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이 싫을 수 없다. 나의 정신적 이성적 의지와 관계없이 본능적인 쾌락은 오히려 본능적이다.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를 보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욕구에서도 우리는 삶의 유리한 방향이 상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욕구는 어떻게 보면 생존과 관련되어 있고 생존에 유리한 모든 행위는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너무 과학적으로만 얘기하지 말고 철학적으로도 접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약간의 숙명론을 파하고자...

  철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현재에도 '행복'에 대한 고민은 진행형이고 그 속에 엔도르핀이나 도파민과 같은 물질에 의한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화학적인 반응이 아닌 인간의 뇌가 반응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 감정을 플라톤은 세 가지 영혼으로 표현하며 '이성, 기개, 욕구'라고 분류하였다. 지혜를 좋아하는 부분,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 그리고 돈을 좋아하는 부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영혼은 욕구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려워 보인다. 매슬로우처럼 그저 욕구를 분류해 놓았을 뿐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나중에 읽는 걸로)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즐거움'에 대한 내용은 사뭇 흥미롭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따르면 즐거움은 전혀 좋은 것이 아니며, 어떤 즐거움은 좋은 것이지만, 어떤 즐거움은 열등하다고 한다. 설사 모든 즐거움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이 즐거움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즐거움은 결핍의 상태에서 충족의 상태로의 과정이라고 했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결여된 상태의 출발을 상정하는 것이다. 고통은 자연적인 상태의 해체이며 자연적인 균형을 회복하면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즐거움은 생성이 아니라 활동이며, 이것은 고유한 즐거움과 이질적인 즐거움으로 구분된다고 했다. 자신의 좋아하는 것을 즐거움을 가지고 행할 때 자신의 고유한 기능에서 진보하게 되지만 활동 자체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한 즐거움은 그 활동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를 하는데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면, '학습된 즐거움'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가 원초적인 학습이라면 본능은 학습된 즐거움일 수 있겠지만 다른 대부분의 즐거움은 '학습하는 즐거움'이 되어야 할 듯하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해 보질 않았지만 아주 가까이 있었던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아주 조금 깊이 생각해 보는 일은 즐거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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