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려면 제대로 해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하게 되면 늘 깊이에 대한 평가는 따라붙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도 예외 없다. 얼마나 깊어야 깊은 것인지, 굳이 깊이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늘 있다. 최근에는 이를 옹호한다는 듯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도 있지 않는가. 얼마나 탁월해야 하나. 그것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창작의 끝없는 욕구는 필요한 부분이지만 깊이 또한 자신의 그릇만큼 만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4편의 단편 소설로 되어 있다. 얇은 책에 비해서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지만 짧은 글이 장편 소설만큼의 생각을 주는 글이라 일단 이해하기로 했다.
깊이에의 강요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전형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평론가가 무심코 던진 문장 '재능은 있지만 이 작품은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라는 말은 미디어가 '깊이가 부족하다'에 집중해서 보도하고 예술가는 그간 충만한 마음으로 작업을 하다가. 불현듯 맞이한 이 말로 인해서 결핍의 마음이 커져가며 자기 붕괴해 버린다. 예술가가 내던진 목숨은 어느새 개인적인 책임으로 갈음되어 버리며 안타까워하는 듯한 기사의 내용에 분노가 치민다.
숙명적인 혹은 살인적인 '깊이에의 강요'는 한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나는 이 글에서 자극적인 내용만 발췌하는 미디어의 폐단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시대와 너무 잘 맞지 않은가.
이런 짧지만 강렬한 첫 작품을 만났지만 사실 이 단편선에서 가장 압권은 작품은 <승부>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이기는 체스를 두는 '쟝'은 불현듯 나타난 젊은이와 체스를 두게 된다. 그의 기세와 예상치 않은 전개에 관중들은 환호하고 쟝은 깊은 시름을 하게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젊은이의 수는 별거 없었지만 관중의 기대는 쉬이 거둬들여지지 않는다. 쟝 또한 깊이 있는 고민을 계속하게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젊은이가 매너 없는 패배 사인을 보내며 홀연히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체스를 제대로 두지 않은 초짜라는 사실을..
쟝은 어떻게 보면 정형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기기 위해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살아낸다. 그런 우리에게 갑자기 저돌적인 인간이 나타난다면 환호하게 된다.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어설프고 무모해 보여도 지지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에 대한 갈증이 뿜어내는 기세는 그를 사랑하게 만들고 영웅으로 만든다. 쟝도 이런 기세에 눌려 자신이 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쟝이 질 수 없는 경기였다. 그는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악의 체스를 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두어가는 상대의 '자유로움'에 비해 자신이 너무 졸렬하게 둔 느낌을 받았다. 상대의 기세에 그의 실력이 형편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승리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승리였다.
이 작품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회의 룰대로 살아가는 것은 진정 자신의 삶인가?라는 것과 내가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데도 주위의 기세에 눌려 주눅 들어 있지는 않는가? 의 문제였다. 젊은이도 쟝도 모두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치관의 문제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더 단단하게 살아내자. 모두의 삶은 특별하고 그것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학의 건망증'은 많은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이었다. 나 또한 얼마 전에 읽은 책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한다. 이런 전문적인 사람마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내어준 답이 좋았다.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대한 문학 작품의 경외감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표절에서도 복잡하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80 페이지 남짓한 이 책은 짧지만 강렬했다. 이 작가이 시리즈가 몇 권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밌으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이 좋았다. (나도 깊이 타령... 나보다 깊으면 깊은 거다.) 가볍게 사색하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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