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혈사 지하굴에 숨어 지내던 왕자는 졸지에 불려 나와 왕에 즉위했다. 암살자들을 피해 목숨만 부지해야 했던 왕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삼촌과 조카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왕실의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보호하려는 자와 찬탈하려는 자가 있었다. 서둘러 스승을 구하고 혼사를 치렀다. 그럼에도 18세의 왕이 맞닥뜨린 현실은 참혹했다. 거란의 황제가 기병 40만을 이끌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왕은 서경까지 내려온 거란군을 마주했다.
그래도 왕의 혈육. 일국의 왕으로서 치욕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승부욕이 강했던 왕은 장수의 항전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민심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도망가는 왕의 행차에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를 따르던 신하들도 제 살 길을 찾아 도망갔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던가. 숨어 있던 충신 하공신은 귀양에서 돌아와 왕이 몽진하였음을 알고 왕을 찾아 내려왔다. 하공신은 전투가 길어져 거란군의 상황도 좋지 않으니 항복의 서신을 전하면 물러갈 명분이 생길 거라 건의했다. 거란의 왕은 이 용기 있는 고려 사신이 마음에 들어 하공신을 데리고 고려에서 철수했다. 거란의 선봉대는 왕의 코 앞까지 와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하공신은 거란 왕의 회유를 물리치다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위기에 닥치면 충신이 드러나는 법. 도망치는 왕을 우습게 보던 지방 유지들도 있었지만 홀대받는 어가를 찾아 직접 섬김을 표하는 충신들도 있었다. 거란의 왕이 압록강을 건널 때 이를 추격하여 거란군을 패퇴시키니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왕은 왕이 되자마자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그는 나라가 세워진지가 1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개경으로 돌아온 왕은 스스로 겸손했다.
내가 스스로 외람되게 왕위를 계승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두루 겪었으며,
밤낮으로 부끄러움과 다투며 그 허물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은 나의 부족한 것을 힘써 도와주고 또 면전에서만 순종함이 없도록 하라.
인사를 독자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조정의 중신들의 건의를 반영했다. 마무리는 미적거리지 않고 늘 깔끔하게 처리했다. 왕이 먹는 음식을 줄이고 지방 백성에게 양식과 종자를 나누었다. 백성이 굶주리는 줄 아는데 어찌 임금만이 홀로 편할 수 있으랴?
이런 치세 속에서도 자신들의 불이익에 항거에 무신들은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자림의 수로 한꺼번에 숙청한다. 2차 거란 침입 시 공을 세운 무관들이었고 그 노고를 잘 아는 왕이었지만 나라의 일이 개인의 감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지만 또한 냉철했고 결단력이 있었다.
왕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능한 자는 유능한 부하를 거느리고 그들이 잘해 주기만을 바란다. 유능한 자는 무능한 부하의 장점을 드러나게 해 준다. 왕은 인재를 등용하고 적재적소에 일하게 해 주었다. 35세의 늦은 과거 합격하여 환갑이 훌쩍 넘은 이 관료를 불세출의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왕은 고려를 대표하는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시호는 원문대왕이고 묘호는 현종이다. 친족 혼을 벗어나는 고려 왕조 중시조에 해당하며 고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이를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인 불천위는 '세종'이었다. 그리고 그가 중용한 꼬장꼬장한 늙은 관료는 바로 '강감찬'이다.
1천 년 전 국난 중에 즉위한 왕은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도와달라 말했다. 리더십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는 행위다. 리더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다. 지금의 시대 필요한 리더는 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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