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철학은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철학의 자리는 과학이 차지했고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철학의 사유와 깨달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과거 위대한 철학자의 것들을 현대에 맞게 끼워 맞춰 가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철학서를 찾는 사람의 수는 점차 늘어가는 것 같다. 지금의 시대에는 인문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소리 높이는 사람들도 많다. 빠른 과학의 발전 속에서 인간마저 인간이길 고민하는 생각을 내려놓는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는 그런 것들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팬데믹 시대. 보건이라는 명분으로 법률을 넘어서는 통제를 가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함이겠지만 그 자체로서 이미 야만적인 결정이라고 얘기하는 이 책은 효형출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저자는 어떻게 보면 현대에 적응한 몇 안 되는 철학자 인지도 모를 일이다. 팬데믹이 발생하고 봉쇄 정책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웹사이트에 기고를 시작했다. 시대와 속도전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충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그리고 상대를 위한 배려라는 행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다. 농경 사회 유전자를 가진 우리는 협력의 유전자는 어느 나라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마스크를 쓰고 격리를 충실히 해내었다. 그럼에도 이탈자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생존이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도덕의 범위에서 조율될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
팬데믹이 확산될 때 진행한 백신 패스(유럽에서는 그린 패스)는 정부의 정책에 호의적인 나에게도 탐탁지 않은 정책이었다. 감염되어 자연스레 격리를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선의 차별을 백신 접종 여부에 따른 차별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그렇게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이나 유럽의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심했다. 그야말로 동선이 완전히 제한당했다. 그 옛날 통행권을 사고팔던 시절보다 더 심하다. 통행권마저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에게 안전이란 있을 수 없고 단지 안전하다고 느끼고 살뿐이다. 이번 팬데믹에서 여러 국가들이 보여준 정책들은 '보건'이라는 탈을 쓴 '독재'라고 얘기라고 한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싶다. 독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야만의 정책이었다. 자본 독재 시대에 보건 독재 시대까지 겹친 상황이라고 할까.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인지한다. 인간에게 얼굴이란 인정을 받기 위한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대단히 정치적인 요소다. 타자로부터 고립된 개인은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격리된 상태에서 디지털로 마주하는 상대에게 얼굴의 요소가 있겠지만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식해야 존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얼굴 없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했다.
팬데믹이라는 비상사태는 '예외 상태'를 만들었고 위헌소지가 있는 정책을 '보건'이라는 명분으로 실행했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두려움은 사람들을 순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 자체로만 본다면 분명 야만적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민족주의가 강해지는지는 지금의 현실과 상관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언제 '파시즘'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는 시대다. 우리는 정책가들도 인지하지 못하는 '파시즘적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저항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생각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보건'이라는 두려움과 '공동체'라는 배려를 생각하면 지금의 일들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일인지도 생각이 든다. 파시즘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의 생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했고, 지금은 그러지 못하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다. 물론 법률로 고립된 개인의 취약함을 얘기하고 있겠지만 디지털로도 충분히 인간임을 인식하고 있지는 않을지, 더 나아가 인간 자체가 변하고 있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건담에는 아무로 레이라는 '뉴타입'이라는 인간이 존재한다. 우주에서 나고 자라서 중력이 있는 지구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는 다른 감각의 소유자다. '뉴 노멀'의 시대에는 '뉴타입'의 인간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고 있다.
세상과 디지털의 차이는 '정보량'이다.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디지털이 만들어낸다면 그것으로 세상 이상의 세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디지털 노마드가 일상이 되고 메타버스 속에서 업무를 진행한다. 물론 물질적인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24시간 디지털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도 생겨날 것이다. (예를 들면 식물인간처럼)
사회가 야만에 익숙해지고 '파시즘'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미래의 것을 믿는다. 디지털 휴먼과 디지털에서 살아가는 휴먼의 구분이 모호해지겠지는 것이 두렵지만 그것 또한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경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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