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인문 | 철학

(서평) 얼굴 없는 인간 (조르조 아감벤) - 효형출판

야곰야곰+책벌레 2022. 10. 17. 07:10
반응형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뉴 노멀'이라고 칭하며 빠르게 따라잡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곤 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강자가 약자가 될 수도 있는 시련의 시기이기도 하면서도 단번에 역전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다. 위기가 기회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팬데믹은 어떨까? 진보를 위한 '뉴 노멀'일까? 지금까지의 결과를 보면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팬데믹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상들에 대한 반박. 음모론자로 몰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우리에게 질문을 과감하게 던지는 이 책은 효형출판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전염병은 항상 있어왔고 또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 가고 있고 이제껏 만나지 못한 생명체와 만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질병과 만나게 되었다. 질병은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삶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코로나19가 시작되던 초기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죽었다. 중국은 엄청난 봉쇄를 실행했고 우한에서는 시신을 처리하지 못하여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 미국과 유럽에서도 같은 현상이 생겼다. 내가 살고 있던 대구에서도 갑자기 환자가 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서구사회와 같은 봉쇄는 없었다. 이번 팬데믹에 잘 대처했던 우리나라에 비해 유럽 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뭇 다른 것 같다. 공권력이 동원되는 봉쇄의 모습은 긴장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의 안내를 받으며 출퇴근도 공안과 함께 했던 중국 출장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느낄 수 없는 공포가 분명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역자의 질문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우리가 비상사태를 받아들이는 이유가 정말 팬데믹이 불러온 두려움 때문이기만 한 것일까?
인권과 자유는 살아 있는 인간들이 아무런 통제 없는 접촉에서만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자는 그의 정치가 혹시 인간만을 위한 지구의 모습은 아닐까?

  이 책이 주장하는 많은 것들과 함께 우리는 역자의 질문 또한 생각해야 한다. 둘의 생각은 배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삶의 지속과 함께 사회학적인 변화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멸망은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싹을 틔운 파시즘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소위 선진국의 민낯을 보여주었고, 제3 지대를 살피지 않는 옹졸함은 변이의 변이를 만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과 중국은 패권 전쟁을 시작하였고, 뒤처지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명분 삼아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켰다. 자원 독점을 무기 삼아 유럽의 증오를 키우고 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지구 위의 인간의 삶을 위해 서로를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은 점점 더 폐쇄되고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던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도 지금의 조 바이든이 트럼프보다 더 미국 중심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저자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는 지금 100년 만에 파시스트가 총리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다. 조르자 멜로니는 자신의 정당의 뿌리가 무솔리니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세상은 분명 바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바뀌고 있다. 서구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는 지금의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제도일까라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들었던 '민주주의 2.0'의 사이트처럼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토론하고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그곳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고, 소외되고, 비난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비단 이번 팬데믹의 백신 미접종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이런 위치에 자연스레 놓이게 된다. 그것은 분명 경제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려움은 군중 속에 들어갈 때 사라진다. 이번 팬데믹 상황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군중의 개인주의는 집단의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정치가들은 그것을 잘 이용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북한을 이용해서 그런 정치를 많이 했다. 세상이 망한다는 공포를 조장하며 다른 생각들을 압살 하곤 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펴려고 하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절차는 지켜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기술-보건을 넘어서는 정책에서도 절차를 너무 쉽게 무시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이 글의 주된 내용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그렇듯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이거나 자신의 목표나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단순히 비난하고 증오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정도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앞에 무력한 게 아니라 '무력할 의지'를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력한 의지'는 권력자에게 나의 의지를 힘없이 내어주고 만다.

  인간은 단일하게 존재할 수 없다. '접촉'이라는 단어가 혼자서 이뤄질 수 없듯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산다. 그 공동체가 가족이라는 작은 범위에서부터 범지구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접촉'은 그것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단지, 랜선 위의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만큼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지는 고민해 볼 수 있다. 인간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 저주 일지 국가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 축복일지는 우리에게 달리지 않았을까.

  인간의 일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