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유'를 가진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그런 간단한 이유만으로 '내 맘대로 할 권리'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자유 이념의 근간이 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는 도입에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얘기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라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란 무엇인가? 를 묻게 된다면 학창 시절 도덕 시간에 배웠던 '자유'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은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을 나는 '방종'이라고 배웠다. 자유론에서 얘기하는 자유는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로 도덕 시간의 그 자유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강압적인 교육으로 또래와 놀지 못하고 '제러미 벤담'과 같은 거장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3살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던 그는 그리스 철학을 원서로 읽었을 정도다. 그의 철학의 근간에는 '공리주의'가 깔려 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외치던 벤담과는 달리 행복의 가치의 크기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배부른 바보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그의 말은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사상에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행복이 깔려 있다. 자유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억압받지 않아야 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경우에는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와 법은 그런 것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상의 것을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좋지 않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였던 것 같다. 인류는 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며 발전해 왔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얼토당토 하지 않는 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당연한 얘기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도 과거의 진리들은 터무니없는 것이 많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진리가 틀릴 리 없다는 자세는 굉장히 좋지 않다. 모든 진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수많은 쟁점들을 이겨내면서 빛날 수 있다. 반대가 없는 진리는 더 이상 힘이 없다. 수학처럼 똑떨어지는 진리도 여러 번 도전을 받았다. 과학은 늘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진리는 이런 과정 속에서 하나의 불변의 진리가 되어 가는 과정이며 결국엔 하나의 도전받지 않는 진리가 되곤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진리를 처음 만들었던 1세대 지식인들은 진리에 대해 도전하는 많은 논쟁으로부터 이겨왔지만 두 세대만 지나도 인간은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게 된다. 맹목적인 진리는 때로는 하찮은 이유로 무너져 버리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토론의 자유는 진리를 더욱 강건하게 하며 새로운 진리가 피어날 수 있게 한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다윈이 모두 그랬고 소크라테스나 예수 또한 그랬다. 더 나은 진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억압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류의 진보는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완벽하다고 믿게 되면 상대의 얘기를 듣지 않게 된다. 그런 결핍의 공간에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난다. 이단들은 그렇게 생겨난다. 서로가 토론을 통한 논쟁이 없이 부정하기 때문에 상대가 부정한 그곳 그 결핍의 공간에서 진리를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 이렇게 맹목적인 순종과 복종은 또 다른 폐해를 가져온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법 문답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답법은 기존의 정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식적으로만 알고 받아들인 사람에게 사실은 그가 그 교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무지를 인정하고 그 교설의 의미와 증거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토론 없이 교사나 책을 통해 자신의 모든 지식을 얻는 경우에 찬반양론의 의견을 반드시 모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다. 찬반양론을 모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지게 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옹호하는 일만 잘하며, 반대자의 반론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내가 책을 읽고 뉴스를 찾아보게 된 계기도 그렇다.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명료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억지에 가까운 논지임에도 꺾을 수가 없었다. 내 논거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논거의 허점에 대해 공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한 독서이기도 했다. 많은 것을 읽으며 내 논거를 쌓은 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갈 생각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는 개인에게 맡겨두었을 때 더 낫을 때 개인의 자유가 정당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것은 경제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류업은 생산의 자유가 있지만 무한정 생산하는 것은 사회에 해가 되기 때문에 생산 제한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도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개인의 자유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는 제약 없이 허용되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개성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대중은 국가가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알아서 다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개인은 국가가 붕괴되더라도 재조직할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국가의 해악이 인내할 수 없어 혁명을 일으켜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개인의 노력과 발전에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고 촉진하는 활동이라도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국가의 가치는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가치다. 국가가 개인을 획일화시킨다면 국민들은 왜소해지게 되고 국가는 그만큼 또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철학에서 다루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민적' 혹은 '사회적' 자유를 얘기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대해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지만 이해관계가 엮여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며, 국가는 이런 부분에 대해 개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얘기 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자유. 다양성을 해치지 않으고 개인을 존중하며 끊임없이 토론하는 자유. 소수자나 어린이, 여성과 남성 모든 인간이 대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미덕이다. 그런 자유야 말로 사회의 충돌을 조율하고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진다.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최대 효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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