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덮은 지금 내 머릿속은 핑핑 돈다. 복잡한 미로 속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책은 철학자의 단편적인 부분을 발췌해서 알기 쉽게 얘기해주질 않았다. 마치 철학을 하려면 이 정도는 각오해라는 느낌이 강했다. 수많은 철학자와 함께 등장하는 엄청난 수의 철학 이론들을 정의와 비판을 오고 가다 보면 내가 지금 누구의 얘기를 듣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만큼 이 책은 철학에 진심이다. 현대에서 회자될만한 철학들이 싸우고 있는 이론과 논거, 반박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야말로 전쟁의 최전선처럼 치열하다.
스스로 철학하고 싶은 사람에게 욕망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으로 작성되고, 철학적 원론으로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이비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과학의 발전과 빠르고 복잡해지는 사회의 변화를 따라 잡기는 역부족인 듯하다. 원론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철학은 엄청나게 복잡해져 버리는 상황을 사유를 하기 전에 이미 다른 것으로 변해 버린다. 마치 동시성이 없는 느낌이다. 철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현실성은 멀어져 간다. 그러다 보니 출판되는 많은 철학책 들은 단순한 위로서가 되거나 그냥 까탈스러운 철학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이것만 알면 끝' 같은 것은 없다. 기본적인 사고의 줄기를 스스로 밟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철학은 얼마큼 배워야 충분한지에 대한 것도 없다. 다음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는 입문서는 그 자체로써 실격이다. 이것은 철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현재의 철학 입문서들은 그런 면이 많다고 했다.
이 책은 '정의론', '승인론', '자연주의', '마음 철학', '실재론'을 다루며 각 이론의 역사 반박과 옹호의 요소를 다루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들 교수까지 나오는 롤스로부터 시작한 '정의론'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인 공리주의를 보완하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복지 사회를 얘기하는 '후생 경제학',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곤 했다. '정의'에 대한 공방은 여전히 치열한 철학의 최전선이다.
'승인론'은 존재는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슬로우 4단계 욕구 '인정 욕구'와도 닿아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여기엔 헤겔이 주장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유명하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유로운 주체이기 위해서 타자로부터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주인임을 만인이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주인은 늘 노예에게 의존하는 생활 능력을 가지고 단지 노예에게 인정 받음으로써 간신히 주인인 상태가 된다. 양자의 힘의 역학관계가 뒤집어질 때 다시 투쟁이 일어나고 둘 사이는 역전이 일어난다. 결국 만인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 승리에 의해 역사는 마무리된다.
'자연주의'는 '과학주의'나 '물리주의'와 비슷하다. 인간의 행동이 인과 법칙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밈'이 등장하기도 한다. 자연주의 철학은 진화론적 생물학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보다 한 발짝 더 나가게 되는 '마음 철학'이 있다.
마음 철학은 뇌과학의 발전으로 최근에 가장 뜨거운 분야이기도 하다. '물리주의자'의 원조는 러셀이다. 여기에는 신경학자, 수학자들이 뛰어들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튜링이 있다. 그는 '튜링 테스트'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초지능이라고 하여 AI가 인간과 같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존 설의 반론이었다. 그에 따르면 주어진 지시대로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이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AI 역시 그저 입력과 출력의 연결하고 있을 뿐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이었다. 행동의 실체화는 가능하지만 의식의 지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 철학'의 뜨거운 논쟁 속에서 새롭게 '실재론'이 재등장했다. 물리적으로 모두 실재한다고 해서 개인이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들과 '함께 느낌'이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에서 실제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라고 샤비로는 말한다. '존재'한다 함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게 주는 '느낌'이 현재화되는 일인 것이다. 마음이 아닌 정신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행위를 밝히려 한다.
지금까지 당최 이해할 수 없던 소위 철학이라는 것이 갑자기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로 보이기 시작했다면, 주의해야 할
순간이다. 그런 시점이야말로 좀처럼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 신체
적으로 거부감이 들게 하는 빡센 테스트를 읽어야 할 때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이 책의 깊이를 수긍할 수 있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50권의 집필하였고 수많은 철학을 다뤘다. 그렇다고 가벼운 책들도 아니다. 그런 책들을 한데 모았다. 시중에 등장하는 많은 철학자들의 도서가 있지만 우리는 유행처럼 그들의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철학을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것을 주장하고 어떤 반론을 받고 있는지도 궁금해야 해야 한다. 아니 궁금하게 만들게 해야 한다. 그런 궁금점을 바탕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는 무엇을 더 읽고 생각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철학자, 수많은 논문과 도서들이 등장하는 이 책은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 같은 책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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