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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 (제임스 P. 카스) - 마인드빌딩

야곰야곰+책벌레 2022. 8. 2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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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에는 결말이 있는 유한 게임과 끝이 없는 무한 게임이 있다. 유한 게임은 게임을 끝내기 위해 하고 무한 게임은 게임을 끝내지 않기 위해서 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한한 게임을 하고 있다. 그 인생 또한 어느 무한한 게임 속에 잠시 참여했다 퇴장하는 한 명일 것이다.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고 몰라도 상관없다. 게임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게임이 지속되길 노력하며 즐기면 된다. 하나의 타이틀을 보고 경쟁하는 유한 게임 대신에 게임이 지속되길 위해 플레이어들과 연대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의 가치를 재창조해가며 다음 플레이어로 넘겨주는 무한 게임은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은 모든 플레이어가 스스로 원해서 플레이를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사뭇 다르다.

  유한 게임은 누군가가 이겨야 하는 게임이다. 모든 플레이어가 누가 승자인지 합의했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유한 게임은 시간적 경계가 있고 명확한 장소와 특정 숫자의 플레이어가 필요하다. 플레이어는 가능한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유한 게임의 규칙은 모든 플레이어의 합의에 의해 이뤄지고 이것은 게임을 끝내기 위한 규칙이 된다. 이는 플레이를 위한 제약이고 모든 규칙은 게임 전에 공표되고 플레이어가 동의해야 한다.

  무한 게임은 그저 게임이 지속되는 것이 중요한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에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공간적 경계나 수적 경계도 없다. 무한 게임에서 규칙은 그저 플레이를 계속하기로 동의하는 것이다. 규칙은 플레이 과정에서 바뀌며 이것은 그 게임이 위태로워졌다는 데 동의할 때다.

  유한 게임은 과거의 게임의 결과가 미래에도 같은 결과로 이뤄진다 믿으며 그 게임에 가장 이상적인 마스터 플레이어를 만들어 낸다. 유한 게임은 과거에 머물게 하며 진지하다(무겁다). 진지하다는 것은 열린 가능성의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측은 유한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이며 게임을 제한하며 컨트롤 가능하다고 믿게 만든다. 새로운 미래를 닫아 버린다.

  무한 게임은 과거의 사실을 이어 미래로 보내준다. 똑같은 게임은 없기 때문에 마스터 플레이어는 없다. 그저 과거의 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사물 그대로가 지식 그대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가치와 비전만 전달되면 그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무한 게임은 미래에 관심이 있고 현재의 미완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가볍다.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유희적이거나 사소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다는 것이다.

  유한 게임 속에는 무한 게임이 존재할 수 없지만 무한 게임 속에서는 수많은 유한 게임이 존재할 수 있다. 유한 게임은 한 편의 잘 짜인 연극과 같다.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연기한다. 결말은 연극을 하는 동안 쓰이고 모든 플레이어가 원하는 결말을 향해 간다. 모든 수가 딱 들어맞아 플레이어의 승리를 가져다준다. 매 순간 드라마틱할 순 있지만 결국 극본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을 마스터 플레이어라고 한다. 하지만 무한 게임은 어떤 결말도 없기 때문에 순간이 드라마틱하다. 과거의 결말은 없다. 과거는 그 자체에 내재된 새로운 시작을 드러낼 뿐이다. 엄마는 극적인 선택이지만 연극적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훈련은 완결된 과거를 미래에서 반복하는 것이고 교육은 과거를 미래로 이어가는 것이다.

  유한 게임에서 승리하면 타이틀을 얻게 된다. 타이틀은 가시성과 주목 가능성이 중요하다. 타이틀은 영원하지만 인정을 받을 때만 존재한다. 그래서 유한 게임 플레이어는 타이틀에 대한 기억을 보장할 수단을 찾아야 한다. 위대한 업적은 불멸의 석판에 새겨지거나 영원한 불꽃으로 기억된다. 때로는 승자와의 관계로 인해 상속되기도 한다. 타이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영구적으로 보증하는 것은 사회의 주된 기능이다. 재산은 우리의 타이틀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상징적인 것이다. 사회적 권위 또한 마찬가지다. 승자의 말은 진리가 되고 패자는 침묵해야 한다. 

  유한 게임 플레이어에 죽음은 육신의 물리적 소멸과 전혀 상관이 없어도 무방하다. 살아 있으면서도 더 이상 타이틀 쟁취를 위해 애쓰지 않고 경쟁을 포기한(모든 유한 플레이를 중단한) 존재가 되면 그들의 말하는 삶 속의 죽음이 된다. 유한 게임의 승자들이 획득하는 것은 사후 생명이 아니라 사후 세계이며,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틀을 계속해서 인정받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걸린 것처럼 보이는(노예제도) 극단적인 형태의 게임에서 상이 삶이라면 죽음 패배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죽음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가해지는 것이 되고 죽지 않으려는 게임에 실패할 때 발생한다. 죽음의 패자의 것이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에서도 나타나며 병에 대한 두려움은 패배하는 것에 두려움이 되고, 사람의 병을 병으로 보질 않고 기능으로 본다. 여기서 병은 암과 같은 것이 아니다. 모델이나 연예인이 되려면 과도한 체중은 병이 된다. 우리는 항상 한정된 활동과 관련해 아프다. 이것은 치유를 위해서 병이 먼저 제거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성적 표현은 사회에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 해결책으로 진정한 성을 은폐한다. 그로부터 성행위가 출산을 목적으로 한다는 규칙과 성적 부적응자들이 규칙을 위반한다는 여기는 편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에 대한 무관심이나 혐오감은 성적 경쟁에서 상대를 패배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패배한 상대를 가진다. 성은 패배한 상대가 승자의 상이 되는 유일한 게임이다. 이런 성적 투쟁은 재산에 대한 투쟁이며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기도 한다. 사랑에서 패하면 모든 것에 패하게 되는 것이 되어 버린다.

  변할 수 있는 것만이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은 무한 게임 플레이어들의 삶의 원칙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는 무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많은 작품들을 결과로 보질 않고 계속 진행되는 투쟁으로 본다. 물려받은 전통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문화의 투쟁은 문화 그 자체와의 투쟁이며 끝날 수 없다. 창의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창의성을 일으키는 연속성이 있다.

  이는 자연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인간 문화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마스터 플레이어에게 이러한 무관심은 용납할 수 없다. 어느새 자연은 억압해야 할 적이 되었고 자연을 예측하고 정복하는 것은 사회 최고 업적 중 하나가 되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우리가 자연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저 자연이 내보이는 어떤 일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연 질서'는 유한 게임을 만들려는 은폐의 언어다. 자연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자연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저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자유다. 밀림의 숲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의 착취 후 나타난 사막 또한 자연스럽다. 그런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연은 관심이 없다.

  자연을 착복해서 만들어낸 쓰레기는 은폐의 대상이다. 그것이 반(反) 재산으로 간주되는 것은 폭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레기는 치울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넘겨진다. 쓰레기는 빈민가에 쌓이고, 오수는 하류로 흘러간다. 공기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의 땅에 산성비로 떨어진다. 쓰레기는 패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타이틀 없음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폐되어야 하고 필사적으로 부인해야 한다. 감추고 무시해야 한다. 자연의 쓰레기는 사회로 들어와 인간쓰레기를 만들었다. 폐인들은 은폐되어야 한다. 그들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추방되고 비난받는다. 자연의 쓰레기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듯이 인간쓰레기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사이먼 시넥의 <인피니티 게임>을 보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굉장한 깊이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유한 게임과 무한 게임으로 단순히 나누며 들어가는 도입부를 넘어서면 본격적인 유한 게임의 폐해를 지적한다. 던젼을 다녀온 플레이어는 귀한 아이템을 얻는다. 캐릭터의 외관상의 변화가 있으면 더욱 좋다.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수록 좋다. 인간 사회가 유한 게임에 집착할수록 타이틀은 중요해진다. 타이틀을 모으기 위해 경쟁하고 타이틀을 보고 환호해줄 관객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경쟁해야 한다. 그들은 패배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게임의 룰이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 마스터 플레이어는 게임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무한 게임에 플레이어가 되어 새로운 미래를 인식해야 한다. 패자에게 침묵을 가용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플레이 속에서 상대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의 지식이 그대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감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나의 미완을 스스로도 노력하면서 다른 이에게도 나눠줘야 한다. 가진 것을 내주어야만 가질 수 있다. 내고자 하는 소리가 입술 속에 있어서는 말이 될 수 없다. 나의 소리를 상대에게 전적으로 내어주지 않으면 말이 될 수 없다. 

  여행은 백 곳을 한 가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백 가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문화의 활기는 사상가들이 얼마나 많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상가들이 새로움을 향해 떠났느냐에 달렸다. 우리 사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한 게임에 참여했는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략하고 싶은 얘기가 없을 만큼 빽빽해서 요약할 수 없었고, 그 철학의 깊이가 깊어 문장을 따오는 수준의 결과가 되었지만 너무 좋은 책이었다. 아들러가 말한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춤이라고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인생은 끝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 게임 또한 순간순간 완성되어 있지만 끝나지 않는 춤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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