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본 것은 일본 드라마 <야마토 나데시코>의 남자 주인공이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파인만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이었다. MIT의 수학자들의 모임이었지만 공대생의 낭만이랄까. 그 말이 너무 좋았다. 파인만이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 읽어보지는 못했다. 양자학의 지대한 공헌을 했고 양자 컴퓨터의 설계도를 남겨 놓고 떠났다는 것 정도였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은 평전인가 양자역학 책인가 헷갈렸다. 파인만 삶 자체가 물리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물리, 물리, 물리다. 그의 다양한 관심사 덕분에 양자역학은 어느새 중력으로 그리고 고밀도 물리학으로 전산학으로 마지막엔 다시 양자역학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모습은 문제를 다루는 모든 과정에서 드러나 있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파인만은 모두 같은 길을 가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했고 모든 과정을 사랑했다. 경험할 수 없는 이론은 늘 의심하고 경계했고 유행처럼 그리고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거들먹거리는 것을 혐오했다. 그는 또한 실용주의 모습도 보이곤 있는데, 양자학을 생활에 사용하고 싶어 양자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수학에 법칙이 없다면 정말 재미없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도 비슷하다.
그렇지 않다면 스쳐 지나가도 서로 몰랐을 터이니
- 오스케, 야마토 나데시코(2000년)
파인만은 어떻게 보면 페르마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 그는 페르마의 최소 시간 경로 원리로부터 물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즐겼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든 것도 페르마랑 닮았다. '발견하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짜 상이다'라고 얘기한 그는 명예 회원이 되질 않기 위해 노력했고 노벨상마저도 거부하려고 했었다. 노벨상을 거부하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받았지만 그는 노벨상 수상자를 정하기 전에 당사자에게 수상을 거부할 권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기여가 있는 논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기도 했고 같은 연구를 하는 후배 연구자가 있다면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지 않기도 했다. 후학의 질문을 대신해주면서도 자신의 것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푸는 과정, 그 자체를 사랑했다.
그는 한번 가봤던 길로는 절대 다시 가려고 했던 습관처럼 학문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스 베테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고 프리먼 다이슨이라는 걸출한 친구도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논문을 작성하지 않으면 나오지 말라며 감금까지 한 친구들의 열정. 파인만의 이론을 다른 논문으로 뒷받침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파인만의 등장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유행하고 있는 학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아니다 싶으면 누구보다 먼저 배에서 뛰어내릴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모든 배에 함께 타는 것을 파인만은 기피했던 것 같다. 양자역학에서 한 획을 그은 뒤 그는 중력에 뛰어들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만들어진 이후 거대한 섬이 되어버린, 이해하는데만 20년이 걸린 이 학문은 누구 하나 획기적인 연구를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양자역학을 풀 때 중력학을 사용했던 파인먼은 중력학을 풀 때 양자역학의 방법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가 만들어 놓은 중력 양자론을 기점으로 블랙홀, 호킹 복사, 끈이론, 양자 우주론 그리고 우주론과 중력파까지 발전해 왔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실용주의적 과학의 실천(비인류적이었지만)을 본 파인만은 모든 이론은 경험과 일치할 때 완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일지도 모르잖아요"라고 얘기하는 이론 학자들을 혐오했다. 실용적인 것을 좋아했던 그는 "초전도체"와 "초유 기체"에도 관심을 가졌었고 지금에야 이슈가 된 양자컴퓨터의 기초를 다졌다.
영혼의 동반자 알린이 결핵이 걸렸어도 결혼을 하고 그녀를 떠나보내고 공허함을 달래려 무수히 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공허함을 채워지지 않았고 그의 지적 호기심만이 그를 이끌었다. 알린은 파인만에게 늘 이런 말을 해줬다. '누가 뭐라 하건 말건'. 그가 다른 길을 가면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영혼의 동반자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훗날 궤네스를 만나 아들을 낳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그의 방랑벽은 잦아든다.
그는 너무 어렵지만 매년 꾸준히 팔려나가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작성했으며, TV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것도 이 덕분인 것 같다. 그는 사이비 과학자, 외계인 납치사건 전문가, 점성가, 사기꾼 등과 싸웠다. 파인만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그저 우연한 사건에 불과한데도 거기서 무슨 특별한 중요성이나 의미를 찾아내려는 성향이 몸에 배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노력했다. 칼 세이건도 파인만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페르마의 최소 시간 경로 원리>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다른 매질을 지날 때에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을 수 있다. 빛은 자연스레 최단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결과들은 수많은 경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최단 경로라는 보장은 없다. 파인만은 늘 이런 의문을 품으며 살았던 것 같다.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풀어내는 것을 경계했다. 누구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복잡했던 것들을 단순화시켜 주었다.
우리는 자연이 내어주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궁극의 물리법칙을 찾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아닙니다. 저는 그저 세상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아내려고 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한 자연 앞에서의 그의 겸손함이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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