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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안중근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 청파랑

야곰야곰+책벌레 2022. 8. 2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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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 작가의 <하얼빈>과 함께 읽을 요량으로 함께 구매를 했다. <하얼빈>이 역사 위에 올려진 소설이겠지만 그럼에도 소설이기 때문에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동안 광복절에만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작은 죄책감도 있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니  <하얼빈>은 역사의 토대 위에 잘 쓰인 소설이었고 다만 스토리 전개의 자연스러움을 위해서 생략된 부분이 곳곳에 있었다는 점만 조금 달랐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것은 비단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그 사실 때문일까. 민족의 원수를 갚아서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는 우리에게는 영웅, 일본에게는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세계에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고 테러는 끊임없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입장에서는 애국자다. 안중근 의사는 이들과 다르지 않은 인물인가?

  자극적인 부제의 결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일본의 입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고 1부는 한국의 입장, 2부는 일본의 입장에서 작성되었다. 두 사람의 내용이 대부분 일치하는 것은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성한 '안응칠 역사'와 일본 측의 법정 자료를 토대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석은 어떠할까? 해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일본의 학자가 온건파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도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행사가 매년 열린다는 것은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우리가 지지하는 만큼의 안중근 이야기를 알 수는 없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자신과 관계되는 것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죽기로 마음먹고 행한 일이지만 가족과 조선의 의병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순사가 가족의 사진을 내밀었을 때야 비소로 가족임을 인정했고 우덕순과 함께 심문받을 때 그와 공모했다는 점을 얘기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남긴 글귀 그 자체에도 숨겨진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안중근은 조선시대 양반을 지낸 아버지 덕분에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살았다. 하지만 충정이 가득했던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 그는 거사를 치르는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토를 죽이는 것은 동양평화를 위해 응당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높은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어미 된 도리로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어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분이었다. 집안이 어려울 때에도 나라를 구하는 일에 후원하는 것 또한 아끼지 않았다.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지만 안중근의 모습을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그기까지만 기억하는 우리에게는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위대함은 뤼순감옥에서 처형될 때까지의 그의 모습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슈파와 도사파의 대립이 있었고 조슈 파는 군국주의의 강경노선이었고 도사 파는 온건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파의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일본에서의 여의치 않음을 알고 일왕에게 고하여 조선통감으로 온 것이다. 뤼순감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조슈파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안중근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인품에 탐복하고 사식과 담배 심지어 우유도 사비로 넣어줬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오오츠 사건에서 러시아 황태자 상해사건을 범한 츠다 산조 순사에게 정부가 극형을 지시했지만 법원은 무기징역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중근의 사건에도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고 외국인 변호사 선임 거부, 한국인 변호사 선임 거부 그리고 극형에 처하라는 명령이었다. 빠르게 군국주의로 넘어가던 시절이라 재판관은 끝까지 법의 위상을 지켜내지 못했다. 더 나아가서는 시신은 가족에게 양도하는 것이 법인데 일본 정부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효창원의 안중근 의사 허묘는 여전히 비어 있다.

  사형이 내려지던 날 안중근 그 이유를 자신의 인(仁)이 부족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족해서여서라고 생각하고 안정을 되찾는다. 그는 그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항소를 하지 않고 글을 쓸 시간을 달라고 했던 안중근의 요구를 뤼순 감옥에서는 인정해주려 했지만 일본 본국에서 형 집행을 빠르게 하라고 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안중근은 옥살이 중에도 일본인들과 잘 지냈는데,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형을 앞둔 사람치곤 너무 평온했고 그의 종교는 독실했다. 그 모습을 본 일본인은 천주를 믿으면 안중근처럼 될 수 있을까 싶어 개종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글을 부탁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와 어울리는 글귀를 적어 주었다. 수감 생활 내내 안중근을 감시와 호위했던 치바 토시치는 그의 글을 꼭 받고 싶어 마지막 순간임을 알면서도 어렵게 부탁을 했다. 안중근은 안정된 상태에서만 글을 적었기 때문에 거절했지만 사형을 집행하러 나가기 직전에 치바에게 글을 남겨 주었다.

위국헌신군인본분 (爲國獻身軍人本分)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 본인의 좌우명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안중근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치바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한 안중근 의사의 배려였다. 치바는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안중근의 사진과 족자를 소중히 했다. 그의 유지를 받은 아내는 남편의 위패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족자를 함께 모셨다. 그리고 뒤를 이어 양녀 미우라는 이를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는 나라의 원수라서가 아니라 청일전쟁의 소칙에 있는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독립'의 문헌을 더럽혀서 일왕과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금광을 약탈하고 민비를 살해한 등의 15가지 죄목 때문이며 이는 동양평화에 해로운 인물일 거라는 생각에서다. 일본은 러일전쟁 즈음에서는 '동양의 평화'는 '동양의 치안'으로 '조선의 독립'은 '조선의 보전'으로 바뀌었다. 일왕은 이 소칙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였지만 이를 부끄러워하여 조상께 제를 지내지 못했다고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70년이 지난 후에야 재조명되었고, 그가 구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을 넘어 한중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큰 뜻에 감탄한 학자들은 한중일 모두 그를 연구하게 만들었다. 중국 소학교(조선족 교과서일 것 같지만) 교과서에서 안중근을 우리나라보다 비중 있게 다루는 것 같았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일본에서의 평가는 나뉜다. 한쪽은 대정치가로 얘기되고 한쪽은 제국주의에 밀려 자리를 차지한 얼굴 마담이었을 뿐 업적은 없다고 한다. 그 당시 가스 가이슈가 살아 있었다면 안중근의 생각에 동조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짧은 생, 허술한 사료들 틈에서도 안중근의 의미를 살피려고 노력했다. 일본 측 제목이 '죽은 자에게 죄를 묻는다.'는 안중근에 빗대는 것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토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죽은 자는 죄가 있어서 살해당했다. 일본에서 조차 존경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가 한 명의 테러리스로 기억되지 않고 위대한 사상가였고 행동가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책이었다. '도마'가 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라는 것조차 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그를 조금 더 똑바로 알게 되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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