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광복절 나는 무엇인가에 끌린 듯 안중근 굿즈를 구입했다. 그기엔 안중근 의사의 유묵으로 적혔던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이 손바닥 모형과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핸드폰 뒤에 그것을 붙여 두었고 케이스도 투명으로 바꿨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라는 말은 큰일을 준비할 일이 없는 나에게도 꽤나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일생은 이순신 장군의 일생처럼 그 가치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그 이상의 것을 배운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이후였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의 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한 명의 위대한 인물로 통하고 있지만 그 또한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일제 강점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향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매일매일 고뇌의 순간 속에 살았다. 그리곤 불쑥 블라디보스토크 떠났고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거사를 진행했다.
이 작품은 거사를 치른 시점을 기준으로 안중근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무언가 대단한 준비가 있었을 것 같은 그날의 일은 오직 신념의 결과였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자신이 총을 쏘았던 이유를 알리고 싶었던 순수한 신념. 그것은 성공했던 그렇지 못했던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십 수분 만에 숨을 거둠으로써 자신에 그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신념을 얘기하지 못한 것조차 안타까워했다.
안중근은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늘 외부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태어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자신을 닮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고뇌가 왜 없었겠느냐만은 그래서 그는 정을 주지 못했나 싶기도 했다. 시댁 아래서 살아가기 힘들거라 생각해서 가족을 하얼빈으로 부른 것도 거사일보다 가족을 먼저 도착했다면 거사를 치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조금은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 나름대로 가족을 살피는 모습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거사의 또 다른 인물은 우덕순이다. 둘은 그냥 같은 목적으로 거사를 진행했다. 정치적 합의는 없었다. 그들의 무덤덤하고 단답형 대화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결연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식의 대화는 거사 이후 진행된 취조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자신의 행동에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취조관이 오히려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에 대해 더욱 강조해서 말하는 두 인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려워했다. 정치적이고 조직적이지 않은 개인이 신념 하나만으로 거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조신인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소설은 시종일관 잔잔했다. 총을 겨눈 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늘 흔들리고 있지만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숨을 꾹 참은 자의 이야기 같았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을 표현하는 문장들에서 미세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필력인지 안중근이라는 위인을 염두하고 읽어서 인지는 알 수 없다. 잔잔한 흐름 속에서도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게 가능했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거대한 제국 앞에 홀로 선 개인의 무모한 투쟁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말살되어가는 민족 투쟁에 대한 트리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신념을 지켜나가는 모습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이 꿈꾼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취조 대화를 살피면 그는 그저 세상에 대해 외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각각의 민족은 스스로 독립을 이룰 때 비로소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자본 독재라는 새로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꿩을 쏘던 총알로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세상을 향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어떻게 보면 공허한 외침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하얼빈에서 행한 단 몇 분의 행동에 함몰되지 않게 그의 펼쳐진 생을 마주하게 해주는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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