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회사 업무의 과중함과 실망에 회사를 잠시 관둔 적이 있다. 회사를 나간다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굉장히 불안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은 사실임을 알았다. 회사를 나와서 조금 쉬고 프리랜서를 하려고 했지만 상무님의 완곡한 부탁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긴 했다.
회사를 그만둔 일주일은 꽤나 홀가분하다. 지쳐있던 몸을 다독이고 회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달까지는 꽤나 초조하고 불안하다. 엄청난 양의 일을 소화하다가 갑자기 전부 사라졌을 때의 느낌은 쉬고 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무언가를 하기를 종용하는 심리가 솟구친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의 등교, 독서, 운동, 독서, 하교, 독서의 루틴으로 이겨내긴 했다. 한 달이 지나면 그 상황에 익숙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통장 잔고가 견딜만해야 한다. (이건 중요하다.) 그렇게 세 달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직장에서는 더 활기차게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불안은 공포와 다르다지만 분명 그 감각은 닿아 있다. 불안은 공포가 곧 닥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안도감이나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에 닥칠 위협에 대해 대처할 수가 없는 마음 상태다. 결국 잘 쉬기 위해서는 그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
지금의 사회는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낙오자라는 낙인을 찍어대려고 한다. 타인과 함께 잘 사는 법보다는 타인보다 잘 사는 것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분명 쉼은 필요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쉬지 않고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 학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결승점에 도착하기 위해서 체력도 늘려야 하고 페이스도 조절해야 한다. 단번에 42.195km를 뛸 수는 없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 사이에는 분명 쉼이 있다. 프로 마라토너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결승점을 지나면 꼭 쉬어야 한다. 야구든 축구든 농구든, 모든 일에는 쉼이 존재한다. 삶이라고 다를까. 쉬지 않으면 쓰러진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다. 한계는 알아야 하고 인정해야 한다.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꾸 쓰러지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불안이라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심리적 기재라서 없앨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괜찮아, 지금은 쉬어야 해. 쉬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어'라고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다독이지 못하면 불안은 공포로 변하게 되고 이런 경험은 결국 학습되게 되고 최근에 증가하고 있는 '공황장애'로 이어지게 된다. 극한의 상태까지 내몰린 공포에 질린 몸의 반응이다.
우주의 역사 속에 인간의 삶이란 찰나조차 될는지 모르겠다. 회사에 일을 할 때에는 나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일하다가도 쉴 때는 '나 없어도 원래 잘 돌아가야 그게 좋은 회사지'라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 다른 이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일을 부탁하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원래 품앗이와 두레를 하던 민족 아니었던가.
워크홀릭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쉼은 노력이 필요하다. 놀아본 놈이 잘 논다고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또 빡세게 달리면 되니까. (노는 건 쉬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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