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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주하는 대상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갖는게 본능이라면, 과연 차별 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대중매체에 다양한 대상이 노출되면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까?

야곰야곰+책벌레 2022. 7. 1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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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87

    인류가 처음 지구 상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여타 동물들과 다르지 않게 집단을 이루며 수렵과 채집을 하며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물론 우두머리도 있었겠지만 나름의 역할과 위치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농경 생활을 시작하며 인간에게는 부라는 것이 생겼다. 뺏길 것과 빼앗을 것이 생겼다. 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뺏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부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만의 역사의 시작이다.

  노예 제도는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무기가 생겼다는 것은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타 부족을 점령한 뒤 해당 부족을 하층민으로 부리는 것으로 노예 제도는 출발한다. 농경 생활이 고착화될수록 무기가 좋아질수록 노예는 급속히 늘어났다. 노예 제도는 모든 고대 문명에서 등장할 정도로 흔한 것이기도 했다. 노예제는 2007년 아프리카 모니타니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6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많은 국가들이 평등을 외치며 노예 해방 운동을 펼쳤다. 우리나라에는 갑오개혁 때 법제화를 통한 노비해방 시도가 있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노비를 해방한 사람들 중에는 여운형과 윤치호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링컨이 노예제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남부 주에서 링컨을 업적을 기리는 포럼이 열리는 데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걸렸다. 

  문명과 함께한 노예 제도는 인간의 DNA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민족주의와 선민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고 못 사는 것은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사회 계급론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하다.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 마저도 못살고 더러운 사람들을 보면 측은지심이 들기 전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동물은 낯선 것을 경계한다.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이다. 낯선 환경은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이며 신체는 자연스레 긴장하게 된다. 긴장된 상태는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의 스위치를 만든다. 스스로 판단하는 이성의 끈을 놓치면 그 스위치를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안을 조장하는 이익집단이나 정치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선동당했다고 얘기한다. 차별은 어떻게 보면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자기 보호 능력의 일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차별이 합리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공평한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를 것이며 행여 잘하지 못하더라도 무시당해서는 안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1등이 있으려면 2등이 있어야 하고 꼴등도 있어야 한다. 모두가 필요한 존재이며 사실 그들 덕분에 최고의 자리를 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많은 친구들을 거르며 진학했지만 이제는 제가 걸러지게 될 지경이에요'라며 농담하는 학생의 얘기가 문득 생각난다. 하지만 어떤 줄 세우기에도 필요 없는 존재는 없다. 

 

 

  2020년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이 사망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 덕분에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폭력적이었으며 그들의 분노가 향한 곳은 백인뿐 아니라 아시아인들이었다. 백인들에게 차별받으면서 아시아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은 명분을 스스로 없애는 것 같았다. 이슈는 정치권도 반응하는데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 힘) 의원들은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의 '차별금지법' 입법 활동에는 선을 긋는 이중적 행동을 보였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정말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정책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은 늘 '사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범죄자에게 왜 더 가혹한 형별을 내리지 않는지에만 몰두한다. '~ 하지 마라'라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것 또한 생존에 중요한 행동 기재라서 그런 것일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중요한 활동이다. 제대로 한다면 한 마리의 소만 잃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차별을 금지한다'라는 구호 대신에 '평등하자'가 더 옳을 것이다. 차별을 금지하다 보면 그 속에서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누리 교수의 강의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우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시즘을 남긴 것'이라고 했다. 차별과 싸우다 보면 우리 속에도 차별이 남겨진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꼴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장애인들을 일반인 학교에서 함께 하는 것을 권한다. 그것은 사회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를 못하면 열등반, 잘하면 우월반 같이 나눠 공부시키기도 했다. 학교가 계급을 나누는 시스템을 만들고 학습시킨 것이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더 잘하고 더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많은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공부는 나보다 못하지만 나보다 잘하는 뭔가가 있는 그 친구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따라오는 결과에 대한 후폭풍은 심하다. 패자에게 손을 내미는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밟고 올라서는 희열을 맛보라고 가르치는 듯하기도 하다. 경쟁이 불가피하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미디어의 취사선택도 편중되어 버린 지금에 대중매체에서 다양성을 송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더 나아가 어릴 때부터 서로를 몸으로 겪어보고 이해하고 인정하는 교육이 생기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인간 본성의 선함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오랜 시간 축적된 내 안에 생겨버린 혐오 때문에 이성적으로 다그쳐도 행동으로 쉬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평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야만의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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