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손재주가 좋다. 처제가 자기는 똥 손이라며 손재주 유전자가 전부 언니에게 갔다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서 내가 나중에 나이 들면 미대 보내준다고 종종 얘기하곤 했었다. 그 외에도 손으로 하는 것은 곧잘 했다. 미싱으로 이것저것을 만들기도 했고 손뜨개로 옷이나 장갑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결혼 전에는 웹디도 잘했고 원단을 다루는 회사여서 원단을 정리하는 것과 더불어 바느질도 곧잘 했다. 육아에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하는 지금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같이 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도 잘하고 싶은 것이 많았으면 했던 나는 아내가 하던 취미를 위해서 바느질 도구를 사고 이래저래 열심히 해봤던 것 같다. 퇴근을 하고 기숙사 구석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총각의 모습을 생각하면 참 별난 취미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지만 당시 사진 말고는 별다른 취미가 없던 나는 바느질이 너무 재밌었다.
아내에게 핸드폰 고리를 만들어 선물하니 이것을 본 처제들이 난리라 처제들과 처 이모님들께 만들어 드렸다. 사실 이 뒤로는 크게 바느질을 한 기억은 없다. 일이 무척 바빠졌기 때문이다. 결혼 후 이 장비들은 고스란히 아내의 것이 되었다.
결혼 후 한참이 지나 취미다운 취미를 할 수 없는 시절의 일이다. 장모님과 아내가 뜨개질을 하고 있길래 옆에서 쳐다보다가 동참하게 되었다. 딸아이의 목도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장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퇴근 후 매일 담소를 나누며 뜨개를 했다. 기술직인 나는 이런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을 그 당시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뜨개 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집중이 되어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처음 하는 거라 너무 당겨 뜨는 바람에 엄청 쫀쫀한 목도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길이도 많이 짧아져서 한해인가 두 해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딸아이가 하고 다니는 모습에 뿌듯했다.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도. 하나의 임무를 완수하고 나니 또 밥벌이가 급해졌다. 기술직에 있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기술에 민감해야 하다 보니 그렇게 또 관심은 멀어졌다.
딸이 자라서 엄마에게 뜨개를 배웠다. 아빠 목도리 만들어 준다며 호언장담을 해놓고 선생님을 먼저 드렸다. 왜 아빠 먼저 안주냐고 물어보니 이제 더 잘 뜰 수 있으니 두 번째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누굴 닮아 말을 잘하는지. 그리고 몇 해 지났지만 여전히 안 준다. 어느 해 물었더니 실이 없어 그랬다는데.. 실을 사줘도 안 할 것 같다.
지금은 아이들과 취미를 맞춰하다 보니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아내가 특별히 짬을 내어 취미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도 안타깝다. 조만간 '니 취미 내 취미'를 또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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