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 - 창비

야곰야곰+책벌레 2022. 4. 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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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로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서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책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매일을 사색하게 되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에서 죽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한 사람의 평범했던 삶과 불현듯 닥친 죽음. 나의 죽음에 대한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주변인들과의 간극에서 오는 분노. 너무 당연하듯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한 모습에서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모를 당황스러움과 남은 자들의 현실적인 심리가 그대로 나타난다.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존재가 사라져 가는 슬픔보다는 사라진 그 틈이 어떻게 메워질지 자신에게는 어떤 득이 생길지 등을 고민하는 모습이 지금 나의 삶과도 그렇게 다르지 않아서 씁쓸하면서도 이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그저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던 인간이었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더 나은 위치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살았다. 적당히 똑똑하고 예의 바르며 자신의 의무는 곧잘 해냈다. 자신의 위치에 맞는 사람들과 적절히 지냈고 남들 못지않은 삶을 살아가려고 여러모로 노력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은 미모와 재력을 가진 집안의 아내를 맞았다. 문제가 생긴 건 아이가 생기고 나서다. 자신의 패턴대로 살아내기에는 아내의 요구는 외란 같았다. 그는 아내에게 원하는 것조차도 정의를 하여 행동할 만큼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에만 집중하는 삶이었다.

  그는 승승장구했지만 성공의 정점에서 알 수 없는 병에 걸린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고통은 점점 심해져 갔다. 자신의 모습은 추해져 갔다. 이반 일리치는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 거듭 질문하며 그 원인을 자신 밖에서 찾기 시작한다. 병명도 알아내지 못하고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치료비나 받아가는 무능한 의사들. 자신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하는 무심한 가족. 그는 이런 현실을 저주한다. 

  밤이면 찾아드는 극심한 고통을 혼자 견디며 죽음과 대면했다.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두려워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죽음과 고통과 함께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괜찮아질 거라며 거짓으로 그를 대했고 그 모습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함께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하인 게라 심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해 주었다. 이반 일리치는 그에게서 안정을 찾았고 그와 있는 시간이 좋았다. 아픈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공감은 '괜찮아질 거야'가 아니라 '많이 아프지?'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게라 심은 이반 일리치에게 자신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반 일리치를 위해서 조금 피곤해도 괜찮다고 얘기해 준다. 이반 일리치에게 게라 심은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어느 날 이반 일리치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사는 것'이라고 대답한 이반 일리치. 그의 대답에 영혼의 목소리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이냐?'라고 되묻는다. 그가 '전에 살았던 것처럼 기쁘게'라고 대답하자 목소리는 '전에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냐?'라고 묻는다. 이반 일리치는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빼고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즐거웠던 유년시절을 지나 현재에 가까워져 갈수록 역겹고 구역질 나는 기억들 뿐이었다.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무의미한지를 생각하면서 이반 일리치는 결국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며 편히 잠든다.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삶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적 태도와 내적 심리 사이에 간극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꼭 소설 속 인물들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능할까? 죽음 목전에 두면 주마등처럼 스친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그제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유가 점점 줄어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보다 '살아가는 일' 그 자체에 더 집중한다. 생명을 유지하고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력 대부분을 쏟는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삶은 사회라는 것에 수동적으로 살다 떠나버리게 되는 것과 같다. 도구적인 삶으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오늘날의 개인의 존재를 깨닫기 위해서는 죽음 앞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치열하게 고뇌했던 이반 일리치가 아닌 조금 더 건강할 때 사색하는 여유를 가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이 빨라질수록 톨스토이의 사색을 엿보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ps. 역자의 작품 해석이 너무 좋아서 책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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