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독후감)/소설

나인 (천선란) - 창비

야곰야곰+책벌레 2022. 1.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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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선란 작가의 글이라 응당 SF이겠거니 했지만 한참을 읽다 보니 이것은 스릴러인가?라는 의문이 생겼다. 식물과 교감을 할 수 있는 것은 마법사의 설정을 빌려도 되지만 그 역할을 외계 생명체가 하게 되었다. 이렇게 판타지가 SF가 되는 것인가.

  외계 생명체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책을 덮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스토리가 신선하지 않았지만 천선란 작가의 엄청난 필력은 나를 사로잡아 읽기를 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장면이 바뀌는 챕터마저도 자연스러웠고 긴장과 감동이 끊어지지 않아 좋았다.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이 독특했다. 주인공 <나인>을 제외하면 <현재>와 <미래>다. 다분히 의도된 이름이다. 나머지 인물들의 이름은 평이했다. 세 사람이 전해주는 메시지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얘기다. 셋은 그야말로 절친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사이다. 이 신뢰는 생각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도현과 원우 사이에 일어난 슬픈 일도 둘 사이의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도현과 도현 부모님의 삐뚤어진 관계도 부모와 자식 사이 만들어지지 못한 신뢰 때문이었다. 믿음은 스토리를 끌어갈 사건을 만들었고 스토리를 정리하는 힘으로도 작용했다.

  다른 또 하나의 메시지는 환경 파괴였고 윤리에 관한 문제였다. 식물과 에너지를 나누는 사이인 누브족은 다른 행성에서 왔다. 그들은 지구의 식물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연과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없는 인간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누브족은 더 예민하고 느낄 수 있었다. 누브족은 다른 행성에서 왔다. 그 행성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었고 엄청난 기후 재앙이 있던 곳이었다. 지구도 곧 그렇게 될 거라는 은연 중의 표현을 하고 있다.

  누브족이 행성을 떠날 때 아름답게 떠난 것이 아니라 우주선 정원을 맞추기 위해서 서로 죽이는 싸움을 벌였고 두 대의 우주선이 지구를 향하는 도중에 한 대가 고장 났을 때에도 두 대의 우주선은 죽음을 불렀다. 인간은 지구가 재앙으로 뒤덮인다면 어떻게 할까? 살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될까? 김초엽의 작품 <지구 끝의 온실>에서도 인간은 인원 제한이 있는 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서로 총을 겨누었다.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지경에 내몰릴 것인지 지금 노력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주요 스토리에 걸쳐 두었다.

  외계인이지만 대단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단지 식물과 소통할 수 있었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한 명의 사라짐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멸종>라고 얘기하며 그 또한 엄청난 일임을 얘기하는 <나인>의 시각이 좋았다.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책의 또 다른 메시지였다.

  책을 읽고 나서 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의 몰입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너무 재밌게 읽어낼 수도 있는 글이었다. 소재가 평범해도 필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천 개의 파랑>만큼의 감동은 없었지만 천선란 작가만의 영역을 넓혀 준 작품임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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