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자로 50년. 이제 90을 바라보는 노인은 여전히 '현역'이다. 어르신들은 나이가 들면 살 만큼 살았다고 얘기하지만 본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전 편의 작품 제목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점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즐겁고 부지런히 살아갈 요량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서도 더 재밌고 더 부지런히 살려고 노력하는 괴짜지만 조금 멋있는 노인의 얘기는 가디언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글에는 어딘지 모를 차분함과 여유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나태주 시인의 <이제는 잊어도 좋겠다>라는 책이 생각났다. 내용은 다소 다르지만 글에서 풍기는 느긋함이 닮아 있었다.
100여 년을 살다 보면 지나친 세월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일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내놓은 삶의 화두와 그에 대한 생각이 그의 반 정도 살아온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서 알 수 있었다. 단지 작가는 내가 가지지 못한 여유로움이 있었다. 관대함이라고 해야 할까? 수긍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젊은 날의 패기는 삶을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여백이 있는 노년이 되는 것 같다. 그것이 진정으로 마음에 파고든 세월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책의 내용은 특별하지 않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어봤음직한 일이나 생각들이 풀어져 있다. 그렇다고 가르쳐 들려고 하지 않다. 고집스러움이 없는 모습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허허 웃고 말 것 같은 흰 수염 가득한 노인의 모습이 그려져서 편하고 즐겁게 읽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만든 그룹의 일원이었고, 도전적인 여성학보다는 인간학을 하려고 했던 완만함도 나의 생각과 닮아 있어서 이해하기 좋았다. 자신이 겁 없는 남편 테스트를 잘 통과했음을 즐거워했고 교수직을 내려놓으면서 이제껏 자신이 가르쳤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배울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너무 멋있었다.
정신의학자로서의 전문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함께 볼 수 있어 좋았다. 자신의 허술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것도 노년의 여유였을까 저자의 본디 성향이기 때문이었을까? 환자들의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성공에 대한 얘기, 성장에 대한 얘기, 행복이나 위로에 대한 얘기들이 아주 평범하게 적혀 있었다. 평범했지만 화자가 바뀌어서 그런지 그 말들의 신뢰를 더해주는 느낌도 있었다.
심리학 서적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에세이 같았다. 심리학적 내용이나 인문학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90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자한 어르신께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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