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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그 이후 (셰리 핑크) - 알에이치코리아

야곰야곰+책벌레 2021. 10. 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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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남겠습니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면 응급의가 된 의미가 없습니다.’ 도쿄 대지진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로 일본에서 방영된 <구명 병동 시즌3, 2005년>는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병원 관계자들과 의료인들을 넘어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그 가족 나아가 재해 일선에서 재난과 싸우는 소방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더불어 집단이기주의에 찌든 정치가가 사회의 재난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친 미국의 뉴올리언스 주의 메모리얼 병원에서 일어난 참사와 많이 닮아 있지만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 사뭇 다르다. 드라마 <구명 병동>에는 국제인도 지원 의사 단 활동을 하며 많은 경험을 쌓은 신도라는 의사가 있었지만 메모리얼 병원에는 영웅이 없었다. 이 작지 않은 병원에서 발생한 재난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재난 관리 시스템이 붕괴하면 환자가 내버려진 채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충격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에 비하면 매우 작은 조직인 병원에서도 이런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국가에 재난 관리 시스템이 없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크게 작게 이런 재난을 겪고 있다.

  카트리나가 덮친 미국의 뉴올리언스 주는 멕시코만에 위치하고 있어 허리케인의 영향을 받기 쉬웠다. 허리케인이 발생 때에는 늘 침수가 발생했고 그들은 그런 침수 상황 속에서 허리케인에 대응하는 것이 익숙했다. 메모리얼 병원은 침수에 치명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비상 발전 시스템과 그것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지하에 있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메모리얼 병원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침수 피해를 자주 받는 병원이 비상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홍수로 불어난 물은 언제든지 병원의 전기가 끊어질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많은 재난 관련 보고서들은 병원들의 구조적 취약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금액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트리나로 인해서 큰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재해나 재난은 실제로 일어났을 때의 손실보다 예방하는 비용이 더 저렴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항상 투입되는 자본을 핑계로 시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고 비판한다. 그러고 나면 개선이 이뤄질까? 쟁점은 늘 정쟁으로 넘어간다. 본질은 흐려지고 흐지부지 되거나 허술한 법안이 통과되며 마무리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들 하지만 다음 소는 잃지 않게 제대로 고쳤으면 한다. 그렇다면 카트리나의 재앙을 겪은 미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료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위급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료행위에 대한 의사 보호법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병원의 시스템이 개선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다. 병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돈을 예방을 위한 개선에 투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작 주목받아야 하는 문제는 내팽개쳐졌고 의료인의 시시비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사회 안전망에 투자하는 돈을 아까워하는 시선들이 여전히 많다. 생명을 위한 일은 포퓰리즘이 되고 하나의 정치적 쟁점이 되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 다른 시각으로 메모리얼 병원을 상황을 보자면,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곳에는 컨트롤 타워가 없었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병원의 중역들은 대피하고 있었고 현장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장에서 지위하는 사람도 임의로 정해졌다. 그들은 병원 내 자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주 정부나 해안 경비대 와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의료인들은 모두 눈앞의 환자들에게만 시선이 쏠려 있었고 문제를 타계할 영웅은 없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의견과 행동은 모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환자들과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있었지만 더 많은 환자를 위해 DNR(연명 소생술 거부) 환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안락사를 시키며 환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에게 죽음을 선물하였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신을 대신해서 죽음을 내린 이 의료인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들은 죽음의 마지막까지 환자의 고통을 함께 마주하는 사람들이기에 조금이나마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반대로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끊어버리는 살인을 저지른 이들을 비난해야 하는 게 아닌가? DNR은 연명치료 거부 의사이지, 진료거부 의사는 아니지 않은가? 가족의 동의 없이 안락사를 진행하는 것은 정당한가? 모든 의문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사사로운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소수의 인원들이 마치 죽음을 내리듯 안락사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갈등의 순간에 필요한 것이 바로 시스템이다. 메모리얼 병원에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쥐고 있는 소수의 인원들에게 선택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고 그들은 월권처럼 결정을 냈다.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의료인들은 책임으로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암묵적 동의를 했다. 시스템은 나쁘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울뿐 아니라 그들에게 일정의 책임을 하라는 강제성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행동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스템이 가지는 가치다.

  시스템을 완성해주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매뉴얼과 컨트롤 타워다.

  재난 상황에서는 언제나 골든 타임이 존재한다. 골든 타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빠른 결정과 행동이다. 매뉴얼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빠른 결정과 행동을 위해서다. 자료를 수집하고 토론하고 의결을 하고 소수의 의견을 보호하며 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을뿐더러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의 시야는 좁고 정확한 판단은 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매뉴얼은 중요하다. 매뉴얼은 사람을 평상시 구상한 가장 괜찮은 방법을 제안한다. 현장은 매뉴얼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막아준다. 재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불안에 떨며 도움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매뉴얼은 재난 속 얼어버린 몸과 머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시쳇말로 ‘지옥문이 열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상황에 발생했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며 누구의 생명부터 구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이번 코로나19의 백신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코로나19 초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환자에 비해 의료기관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정책은 고령자는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오지의 제3세계의 얘기가 아니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스페인의 얘기다. 이런 결정은 어떻게 내려질 수 있을까? 노인의 생명보다 젊은이의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것일까? 귀하다는 표현은 상대적인 것이다. 자신의 2세가 가장 소중할 수도 있고 자신을 낳고 길러 준 부모님이 소중할 수 있다. 때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장 소중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결정은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비하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을까? 매뉴얼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갈등이 생겼을 때 결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의료 붕괴가 발생했을 때 논인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구조를 가장 마지막에 한다는 등의 내용은 분명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가 필요한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면 살 수 있는 사람부터 구출해 달라는데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고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결과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공감대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반대가 무서워(혹은 귀찮아) 그런 공감의 일을 회피하고 있다. 재난이 발생하면 아이와 여자를 먼저 구출하라는 매뉴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도 몇 해 전 매뉴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건이 있었다. 참여정부가 만든 2800권의 매뉴얼은 차기 정부가 진행한 흔적 지우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철저하게 폐기되었다. 그러면서 만든 국민안전 종합대책은 각 부처들이 재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선 긋기 바쁘게 만들었다. 참여정부의 NSC 산하에는 위기관리센터가 있었다. 위기는 모두 33개로 분류하고 위기 별 대응할 부처와 기관을 명시해 놓고 그들이 해야 할 일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 매뉴얼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매뉴얼의 부재는 우리가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겪게 된 이유일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의 중요성은 이번 코로나19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정은경 청장이 이끄는 질병관리청과 전국의 의료인, 119 구급대원을구급 대원을 및 공무원들의 움직임은 컨트롤 타워의 존재를 확인시켜 줬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 대부분은 긴장하게 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사람들은 시야가 좁아지고 쉽게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책임의 문제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문제집으로 보자면 매뉴얼이 기본이나 원리를 적어 두었다면 컨트롤 타워는 심화, 응용문제를 풀어나가는 곳이다. 매뉴얼을 기반으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현장과 매뉴얼이 맞지 않는 부분은 빠르게 수정하며 현장에 전달해야 한다. 자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현장의 상황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넓은 시야로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컨트롤 타워가 없는 것은 뇌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메모리얼 병원과 같은 일이 발생하고 만다. 의료인들은 오직 환자들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병원 내 상황을 파악하고 병원 외부로 끊임없는 소통을 해야 하는 컨트롤 타워의 부재는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스스로 버리는 일을 만들었다. 비축 창고에 버젓이 있던 깨끗한 물을 사용했더라면 전기가 공급되던 암 센터 건물을 사용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병원으로 날아들던 헬리콥터와의 소통만 제대로 했다면 더 많은 환자들을 더 빠르게 병원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매뉴얼과 컨트롤 타워의 부재였다. 즉 병원 내 존재해야 할 재난 관리 시스템의 붕괴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재난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문제로 대두될 때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지겹다고 그만하라 한다. 하지만 재난이라는 것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개인의 생명을 담보로 이뤄지는 이런 작은 재해부터 많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죽어나가고 있다. 2020년 산업안전재해로 사망한 사람은 900명에 육박한다. 2020년에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1만 3천여 명이다. 우리는 매일을 재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작지만 귀한 생명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챙기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회 안전망을 만들어 가는 것은 결코 포퓰리즘이 아니다. 사회가 붕괴되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나라들이 그렇게 많은 세금을 쏟는 것도 그러면서도 건재하다는 것은 분명 우리도 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작은 재해라도 관심을 가지고 대응책을 만들다 보면 이런 책을 역사 속에서나 만나야 하는 그런 날이 올 거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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