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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배신(윌리엄 데레저위츠) - 다른

야곰야곰+책벌레 2021. 5. 1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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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계발이라는 화두는 IMF에서 일자리를 잃어가던 부모 세대의 모습을 보며 자란 우리 세대들에게는 '삶의 발버둥'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공부는 끝이 없다는 모토로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살아가고 살아남기 위해서 배운다. 그런 삶에 마음의 환기가 필요하여 집어 들었다.

'공부의 배신'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마구 쏟아내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공부에 미 처사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니라는 답을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상은 언제나 멋지게 틀린다.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몇 해전에 '노력의 배신', '다큐의 배신'이라는 논란이 있었던 EBS 다큐 '공부의 배신'과 많이 달랐다. 글쓴이는 공부를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방향성과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교수님은 저희에게 '네 열정을 찾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 방법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대학 졸업을 넘어서 명문대 졸업을 청소년기 최대 목표로 잡고 살아간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억울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 미국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삶의 질이 중요하다며 너도나도 유럽식 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유럽에서는 아이들의 학습 능력 저하를 우려하며 '한국식 교육'에 주목하는 아이러니 한 상황도 생긴다. 나도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어도 힘겨움이 있었으며, 그 당시에는 유럽식 교육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교과서와 학습지만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유대인 교육'이니 '핀란드 교육'이니 해도 나는 여전히 '한국식 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거대한 파고' 앞에서 그것을 거스르지 말고 동화된 상태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야 하니까. 

  지식 사회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총, 칼을 내려놓고 '지식'이라는 권력을 들었다. 앨리트들은 부모세대가 가진 권력으로 그들만의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에 맞게 개조되어 간다. 명문고, 명문대, 일류 기업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거스러기 힘든 것이 되어 간다. 자신과의 괴리가 깊어감에도 그만두지 못한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였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곧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더 바쁘게 살아가고 시간은 아껴야 한다. 비어 있는 시간을 가만두지 않는 불안감도 생긴다.

수많은 학생들이 챗바퀴를 돌듯 1 ~ 2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뜬다.
학생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앨리트들을 바라보는, 엘리트 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사회는 '불안 마케팅'을 끊임없이 한다. 학습지, 학원, 과외 엄청나게 쏟아낸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로 살아가고 엘리트들의 '권력'은 더욱 확고한 것이 되며 자존감의 근원이 된다. 가끔은 '특권'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앨리트를 비난해 줄 사람은 없다. 비난에 대해서 대처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무비판적이며 현실과 타협하며, 주변의 시선에 휘둘려 자신이 원하는 것도 상관없이 살아가며 더 나가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헛똑똑이'가 되고 만다. 삶에 있어서 '당신이 틀렸다'라고 얘기해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일류'만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목적'이라는 것에 함몰되고 만다. 일류 기업까지 무사 입성한 친구들은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한다. 이제껏 사회에 사회가 내어준 공식에 맞춰서 살아만 왔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공부하려고 할때 "그거 배워서 어디서 써먹으려고?"라는
냉소적인 질문은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교육은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었으며, 시나 에세이, 철학 같은 공감과 생각을 요하는 문학 대신 경제, 경영, 기술, 자기 계발 등 일류가 되기 위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리더십도 '의무, 명예, 불굴, 친절, 이타심'의 의미에서 이제는 성공을 향해 이끌어가는 하나의 대명사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봉사도 '연민'의 의미가 강해졌다. 성공한 자가 내려주는 은혜 같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 시대의 강한 중앙집권 의식과도 닮아 있고, 사회진화론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결론적으로는 '진정한을 공부를 배신하게 한 현대 시스템'을 비판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는 산업의 일꾼들이 필요했었고 교육은 변화하는 세상이 필요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재'들은 모두 현대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도 '노력'은 귀한 것이고 박수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내가 더 나은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면 결코 높이 올라갈 수 없다.

  세상은 점점 더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한 곳으로 몰리던 엘리트는 각각의 곳에서의 엘리트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대통령보다 연예인이 하고 싶고 게이머가 되고 싶은 아이들이 생기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삶의 '목표'를 자신이 정하고 노력하고 수정해야 한다. 장래희망이 '직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글쓴이는 얘기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장래 희망을 '아픈 사람을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사나 간호사가 될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지만 '의사'라고 한다면 의사 본연의 정신보다 '돈 잘 버는 의사'가 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목표는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은 여전히 '공부'라는 것은 계급이고 권력이다. 하지만 그 공부도 많이 넓어졌으며 춤과 노래가 될 수도 있고 요리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진부한 얘기지만 '난 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내면의 고민을 한다면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조금은 더 오늘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조금은 더 의미를 가져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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