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문학이라는 것은 일본에서 시작된 단어인 것 같다. 글로 된 대부분의 것들일 것인데 이렇게 나눠 써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서브컬처 문학이 강한 일본이라면 순문학이라는 용어가 필요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 역시 순문학과 장르문학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순문학에도 장르가 있을 텐데, 그 의미를 특정 짓는 것 같다.
인간 저마다 스토리를 통해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오쓰카 에이지는 대부분의 인간의 불완전한 연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건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면의 목소리는 밖으로 분출되면서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화'라는 것으로 분출되지만 하나의 스토리로 차분하게 내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 작법이 필요하다며 '이야기론'에 관한 책을 계속해서 출판하고 있다. 시대가 지날수록 사회 속에서 '자아실현'이라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그것을 이야기로 통해 도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에 프로파간다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일지도 모르겠다. 선동이라는 것은 국민이나 민족의 '정체성' 강화에는 꽤나 중요할 수 있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방향의 정치적 입장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작품은 독자에 의해 다르게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라도 국경을 넘을 때에는 역사로부터 단절되며 서브컬처화 된다. 일본에서 좌익이라고 비난받는 저자도 한국으로 오면 우익으로 비난받는다. 작품에 프로파간다가 강력하다면 저자는 의도하지 않은 여러 상황에 맞닥트리게 된다. 서브컬처가 주류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면 국경을 넘은 작품은 서브컬처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때로는 다른 의미로 새롭게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이다. 식문화처럼 말이다.
이야기를 통한 자아실현은 소수의 작가를 제외하면 어쩌면 '오타쿠'의 영역이었을지 모른다. 오타쿠라는 의미가 많이 바뀌었지만 시장에서 제공하지 않는 것을 직접 만들어 내던 그들의 모습에서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자아실현은 결국 또 주류의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런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던 크리에이터적인 오타쿠와 다르게 요즘의 오타쿠는 문화를 소비하는 유저 입장에 머무르고 만다. 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소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주류 안에 섞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자기만의 표현 방식, 자아실현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크리에이터가 아닌 소비자로서의 오타쿠들에게 서브컬처는 하나의 상품이어야 하고 그 속에 프로파간다를 만든다는 것은 사회에 대해 영향을 준다. 작가는 그 점을 인지하고 책을 자각해야 한다. 어느 시대든 정치와 엮이면 지금의 문제를 밖으로 돌려 이상한 시나리오를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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