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주의 경제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기업은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정책은 주주의 손에 있고 노동자는 그들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주주의 충성스러운 CEO는 멋들어지게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들은 대통령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다. 오직 주주에게 만족을 주며 자신의 가치를 올려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1980년 레이건이 신자유주의를 받아 드릴 때 CEO와 노동자의 수입은 43배 차이가 났다. 2005년에는 411배 차이가 났다. 늘어난 부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뉴라이트) 그리고 조합주의라고 불리는 이들의 재난 자본주의가 세상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이 책은 모비딕북스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책의 초장부터 불쑥 나타난 프리드먼. 저자가 끈질기게 언급하는 이름은 100페이지를 넘어설 때쯤에 생각이 났다. <선택할 자유>를 쓴 사람이다. 우리나라 뉴라이트는 그리고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길래 이 지경인가라는 궁금증에서 구매한 책이었다. 자유기업원이라는 홈페이지의 후기들에서는 마치 종교집단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에 대해 그렇게까지 집요한가? 부시가 말한 자유와 기업 할 자유를 따로 설명할 정도로 그들의 자유는 소중한 것인가? 그들의 열렬한 지지가 사뭇 의심스럽다.
책을 읽다 보면 공산주의 vs 민주주의, 사회주의 vs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자주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엮여서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저잣거리에 걸린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복지는 포퓰리즘 더 나아가 공산주의라고 까지 공격을 당한다. 보수나 진보다 그 수준이 오십보백보인데도 그 비난은 상대만을 향해 있다. 이쯤 되면 이념이라는 게 그냥 고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유토피아를 보여줬다면 신자유주의는 기업인의 유토피아를 보여줬다.
어느 경제학자의 말에 의하면 경제학은 여전히 미개한 수준이란다. 사실 경제라는 건 양자 컴퓨터로 풀어내야 할 정도로 변수가 많다. 숫자 놀음이었던 경제는 행동 경제학이라는 심리학으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게 다 사람 심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걸출한 두 명의 인물이 있으니 케인스와 프리드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은 꽤나 대척점에 있다.
프랭클린의 뉴딜 옆에는 케인스주의가 있다. 대공항을 막아낸 그들은 주류였다. 성숙하지 못한 시장은 조정이 필요하다. 시장 경제에도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야 하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왜냐면 극단에 치달은 대중은 변혁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늘 먹고살기 힘들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 혁명은 반드시 반대로 흐른다. 소련이 건재했던 당시에는 굶주리는 나라는 독재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했기에 프랭클린의 뉴딜은 그나마 순수했는지 모르겠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보다 독재와 친한다. 민주주의의 질이 높은 사회일수록 그들이 설 땅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영화, 시장개방, 복지 축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그나마 투표권만은 평등했기에 그들의 정책은 시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급진적 경제성장으로 상대를 현혹했다. 수많은 독재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를 시행하기 위에 수많은 핍박과 처형이 이뤄졌다. 공포 정치는 대중을 침묵하게 할 수 있다. 당장의 목숨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동체의 가치는 기득권에게 약탈당한다.
브라질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러시아에서 여러 동남아시아 그랬다. 독재의 공포 속에서 대중들이 쌓아 올린 것들은 모두 헐값에 매각되었다. 공공재를 탐하는 민간 기업은 식민지를 탐하던 제국들과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독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테러, 자연재해는 또 다른 쇼크를 가져다주었다. 대중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 동안 부리나케 해치웠다. 재난은 더 이상 악재가 아니었다.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기업들의 주가는 치솟았다. 주식을 하는 나 또한 재난은 기회로 인식되고 있으니 그 습관이 얼마나 몸에 베였는지 알 수 있다.
IMF나 세계은행의 횡포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IMF의 기억은 무능한 정부와 세계 기금의 원조였다. 하지만 실상은 많이 다르다. IMF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민영화 대량 해고 그리고 복지 축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많은 나라들이 그런 압박에 손을 들었다. 많은 돈 되는 것들이 헐 값에 팔려 나갔다. 재난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이런 일은 미국 내에서도 일어났다. 많은 조직들이 민영화되었다. 군대와 같은 안보까지 민영화의 손은 뻗어왔다. 정부가 없어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구겨서 어디에 처박아두고 싶다고 얘기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대부분을 말해준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에 못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를... 그렇게 집중된 부는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모두의 재산을 해체해서 특정인에게 주었다. 이라크에서도 팔레인스타인에서도 그랬다.
팬데믹은 어떻게 보면 각성의 시간이었다. 해체된 정부의 열악함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재난을 이익으로 만들려는 기업들의 탐욕 또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모습은 음모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음모론을 다 제쳐두더라도 그동안 행해져 온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정책의 슬픔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저자는 '고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시작한다. 사람이 쇼크를 받으면 백지화된다. 사람을 세뇌시키는 방법은 그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은 퇴행하거나 죽거나 하기도 한다. 모두의 재산을 팔아서 특정 사람들의 배를 불렸다. GDP만 보는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 위에 그 숫자가 써여졌는지를.. 나 또한 몰랐다.
아프다고 모든 걸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 건 이상적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재난은 어떻게 보면 연대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미워하던 사람들도 힘을 합쳐 하나가 될 수 있다. 내전으로 힘들었던 스리랑카도 그랬다. 새로운 정책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회복에서 우리는 우리임을 알아채기도 한다. 상처는 아물면서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그런 기회를 돈으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세계는 멍들었다.
저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애덤 스미스가 두 어번 얘기한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에 이용되는 건 다윈의 '적자생존'이 사회 진화론에 이용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이면서도 윤리철학자다. '도덕감정론'을 쓴 그의 생각처럼 인간은 탐욕을 다스릴 만큼 도덕적이지 않은 것이다. 돈의 독재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프리드먼 스스로 얘기했듯 남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 세금은 남의 돈이 아니고 투자는 남의 돈인 것이다. 이 책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많이 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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