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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지미라 엘 우라실, 프리데만 카릭) - 원더박스

야곰야곰+책벌레 2023. 10. 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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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완벽한 서사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인간은 허구의 상상을 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것이 미래에 닥칠 여러 상황을 상정하는 진화의 흔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만든 이야기는 인간을 그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야기. 그것은 이야기의 핵심. 내러티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이야기에 따라 흘러간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따라서 말이다.

  소설 플롯의 대한 이야기부터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적 이야기 구조를 분석하는 이 책은 원더박스의 지원으로 읽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영웅의 서사를 좋아한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여전히 전쟁에 관한 역사에 흥미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인물이 실존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다. 모험을 시작하고 역경을 견디며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돌아와 평화롭게 지내는 이야기는 알고 있으면서도 재미나게 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스토리텔링'에 대해 강조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스토리가 가지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리에는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둔 인간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들이 있다. 그것을 위해 '마스터 플롯'을 알아야 한다. 마스터 플롯들은 여러 키워드로 나타낼 수 있다. 경쟁, 구원, 탐색, 변신, 복수, 약자, 사랑 같은 것들이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 즉 호모 나랜스라고 얘기한다. 이는 인간의 발달을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재미난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공통점이 있다. 복잡한 문장 속에 참조를 생성해 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문법의 형식도 보편적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시간 감각이라는 것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왔음에도 우리가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지구 위에 있는 우리가 중력을 의식하지 않듯 물고기가 물에 대해 설명할 수 없듯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 이 책은 작법서가 아니다. 인류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를 통해서 해석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려한다. 그리고 그 플롯은 영웅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길 원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 중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신에게 돌리기도 하였으나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업적을 중시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하층 계급은 도덕적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성공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상속에 가까운데도 화살은 더욱더 개인을 향하고 있다. 영웅의 서사를 따르는 현대인들은 자기 계발에 목숨 걸듯 바쁘다. 몰입처럼 자신을 잃어버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전투를 미화시키는 많은 콘텐츠는 파시즘의 정의가 된다. 현재 우리에게 파시즘은 느껴지지 않지만 파시즘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스토리는 차고 넘친다. 긴급한 위협 때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면제된다. 그들은 그저 싸울 뿐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행복이 최고의 가치일 수 있지만 파시즘은 '구원'을 제공한다. 더 큰 확신을, 초월적 사명을 전달한다. 영웅이 되기 위해 거대한 위협이 있어야 하고 세계는 무너져야 한다. 악을 제거해야 하는 영웅에게는 말살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된다. 자기 삶에 대한 좌절을 다른 민족에게 돌리는 망상은 히틀러를 놓았고 그저 자신은 할 일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많은 독일인을 낳았다. 인간은 누구나 강력한 영웅이 되길 원하기도 하지만 악당이 되는 걸 꿈꿔 보기도 한다. 산업이 파시즘의 미학을 다루는 방식이다. <라이온 킹>에서도 스카의 독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여성 혐오의 내러티브는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낙원을 떠나게 만든 원흉이 된다. 즉 여성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판도라는 여성이 섹슈얼리티를 무기로 영웅을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내러티브를 만들어 냈다. 세이렌은 선원을 유혹하고 서큐버스는 남자의 정자를 갈취한다. 마녀는 사냥당했다. 영화 <귀여운 여인>은 여성의 한계성과 섹슈얼리티의 상품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치명적인 여성 '팜므파탈'은 위험한 여성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남성의 두려움이 반영되어 있다.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여성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게 되었다. 쾌락적이고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을 등장시켜 남성을 파괴하는 상징을 만들어 냈다. <백설 공주>, <잠자는 숲 속의 마녀>, <라푼젤>의 적수들이 대부분 이에 해당한다. 공주는 가치 있지만 고독한 여왕은 그렇지 못한 이유다. 여성 혐오는 두 가지 지점에 항상 존재한다. 하나는 감정적이고 에로틱한 조작이 이뤄지고 또 하나는 순응하지 않는 여성에 따른 부정적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암컷의 80%를 수컷 20%가 차지하는 것은 자연의 보통 현상이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자발적 독신자의 여성 증오도 존재한다. 인셀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여성은 외로운 남성의 존재적 비참함에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내러티브는 자유화된 사회에서 섹스에 대한 접근이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적 결핍 현상을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에 대한 정당성으로 해석한다. 

  지금까지의 스토리가 기후 변화와 같은 집단적 이슈에 힘들 쓸 수 없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영웅적 서사에 집단이 움직여 해결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며 쳐 부셔야 할 적대자를 지정하기도 어렵다. 적대자가 없으니 주인공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에 비해 경제적 수치와 같은 것은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세대가 태어날수록 그들에게는 망가진 자연이 '노멀'한 상태라는 것이다. 인간이 '밝은 면'만을 보려고 하는 감정적 측면도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 스토리의 가장 큰 잘못은 언제나 늘 인간을 주인공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인간 역사에는 새로운 플롯과 스토리 라인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플롯을 파악하고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스토리의 덫에 걸리지 않게 노력해야겠다. 변하지 않는 게 가장 편하지만 그건 인간 서사에 나를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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